본 관

나주 정씨의 본관은 원래 압해(押海)였다. 압해에 살던 우리 조상은 고려(高麗) 때 정성(丁姓)으로 토성분정(土姓分定)을 받았다. 압해는 전라남도 무안군에 속해 있는 면 단위의 도서이다. 백제 때에는 아차산(阿次山)군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산세가 바다를 압도한다는 뜻으로 압해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로 들어와서는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한때 영광군(靈光郡)에 예속되었고, 얼마 후에 다시 나주로 귀속되었다.

그 후 고려 말엽 이래로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1409년, 즉 조선 태종(太宗) 9년에 감사 윤향(尹向)이 도내 주읍(主邑)에 소속되어 있던 속현(屬縣)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을 모두 폐지하여 소속 주읍으로 통폐합시켰다. 이때 나주목 관내의 토착 성씨들은 종전의 소지역적인 본관에서 나주라는 대본관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조들이 본관을 압해로 쓰던 습관은 그 뒤에도 오래 계속되어 왔다. 1660년 간행된 정시걸(丁時傑)의 《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이 그 예이다. 1677년 간행된 해영보의 이름이 《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라 하였고, 그 뒤 점차 나주를 본관으로 쓰는 예가 많아졌다.

영조(英祖) 시대에 와서 압해가 폐읍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던지 압해를 버리고 도리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서 근자에까지 약 200여 년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압해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어 더러는 압해정씨 또는 나주압해정씨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구체적인 원적지를 따지자면 이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하겠지만, 지금에 와서 나주를 버리고 압해로 복귀한다는 것은 기실 행정 절차나 그동안 지켜온 인습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쉽게 고쳐질 일이 아니기에 우리 종회에서는 계속해서 본관을 나주정씨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