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 족보의 유래
나주정씨 족보는 관운공(觀雲公 휘 時傑)이 쓰신 《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을 효시(嚆矢)로 하고 있다. 《술선록》은 그전부터 내려오던 《월헌첩(月軒帖)》을 근거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고려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을 시조(始祖)로 하고, 관운공의 자가(自家) 일계(一系)를 중심으로 그 후 18세(당신)까지 스물두 분을 수록해 놓은 일종의 축약된 족보라고 하겠다. 여기서 만약에 《월헌첩》을 참고하지 못했다면 시조로부터 11세 소격서령(昭格署令 휘 子伋)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우리 선조에 대해서는 지금 아무것도 모를 뻔하였다. 어쨌든 《술선록》은 족보의 체계를 갖춘 첫 번째의 우리 족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또 추호의 과장이나 허구도 없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만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다는 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자랑해온 사실이다.
역사학은 첫째 사실에 입각해야 하며 그 사실은 정확한 자료에 근거해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이론과 방법을 구사하더라도 그 근거 자료가 거짓이거나 조작되었다면 그 주장이나 결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올바른 사론은 정확한 사실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정확한 사실은 또한 객관적이고 진실한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들의 성관(姓貫)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양반이란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조상의 혈통과 명조 현조를 확보하는 데서 연유한다는 문벌의식이 유난히 강했던 조선사회는 후기로 올수록 후손 또는 신흥 세력들에 의한 족보 편찬에서 본관을 개변하거나 조상 세계와 파계(派系)를 조작 가탁하는 행위가 자행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나온 족보들을 살펴보면, 편간 당시 당대인의 소록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조상 세계와 파계에 따라 투탁ㆍ가탁ㆍ모관ㆍ개관과 같은 성관의 혼효를 초래했는가 하면, 각 성관의 유래와 분관ㆍ분파 및 조상 세계에 관한 기술은 너무나 역사적 진실과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무엇보다 우리 가계(家系)는 여말에 작성된 선조 호구(戶口)를 전제한 《월헌첩(月軒帖)》이 15세기 후반 정수강(丁壽崗)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여 전재한 《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1660년 편찬)이 17세기 정시걸(丁時傑)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정시윤(丁時潤)ㆍ시걸(時傑)ㆍ창도(昌燾)ㆍ균도(均燾) 등에 의해 압해정씨의 최초간행 족보인 《해영보(海營譜)》(1677) 내지 《순천보(順天譜)》(1702년)가 편간되고 또 당대의 보학자인 동족의 정시술(丁時述, 1608-1684)에 의해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선세(先世)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 정다산(丁茶山)은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과 <가승유사(家乘遺事)>를 비롯하여 <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과 <석갑산정씨육총변(石岬山丁氏六塚辨)>을 찬술하는 등 당시 만연되고 있던 위보(僞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거론한 바 있다.
순번 |
명 칭 |
발행연도 |
주도자 및 서문 |
발 문 |
내 용 |
1 |
《월헌첩(月軒帖)》 |
1520년경 |
月軒公 휘 壽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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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첨정첩(僉正帖) 보기(譜記) 수촌록(水村錄) |
1550년경 1600년경 1628년경 |
玉精 胤祐 彦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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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압해정씨술선록 (押海丁氏述先錄)》 |
1660년 |
觀雲公 휘 時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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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해영보(海營譜)》 |
1677년 |
昌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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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순천보(順天譜)》 |
1702년 |
時潤 |
均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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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경오보(庚午譜)》 |
1870년 |
洵敎, 大翊 |
大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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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신미보(辛未譜)》 |
1931년 |
大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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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신축보(辛丑譜)》 |
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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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懿, 奎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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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기묘보(己卯譜)》 |
1999년 |
海昌, 宜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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