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장지(世葬地) - 선영(先塋)
역대 세거지에 따른 세장지도 여러 곳 있는데 옛날에는 불과 10여 소에 그쳤으나 세월에 따른 종원의 증가로 말미암아 수 십 곳으로 확대되었다. 우선 《술선록》에 나와 있는 선영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그 나머지는 대표적인 지명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압해(押海)-관적지(貫籍地)
2. 덕수(德水)
3. 배천강서(白川 江西)
4. 배천율학(白川 栗壑)
5. 토당(土堂)과 무원(茂院)
6. 광주의 낙생(廣州樂生)
7. 충주의 단월(忠州丹月)
8. 여타 선영
①압해(押海)⎯관적지(貫籍地) |
나주정씨의 관적은 원래 압해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압해는 목포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지금도 한 면소재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시조할아버지 정윤종(丁允宗) 이래 혁재(奕材) 양(良) 신(信) 준(俊) 공일(公逸)의 여섯 할아버지가 대대로 여기에 터를 잡고 사시던 고장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본적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압해도는 그 규모와 지리적인 환경 관계로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었었다. 즉 왜구의 침입이나 전쟁 등으로 때로는 무인도가 된 적도 있었다.
조선조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 등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여지승람(輿地勝覽, ⎯후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개편됨.)의 나주압해지(羅州押海誌) 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주의 고적(古跡)인 폐현 압해는 나주 남쪽으로 4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압(壓)자는 압(押)으로도 쓴다. 본래부터 바다 속의 섬이다. 백제 때는 아차산(阿次山) 군이었다가 신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여전히 군으로 삼아왔다. 고려 초에는 나주에 속하였으나 후에 영광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그 후에 다시 나주에 귀속하였다. 그 후 땅을 잃은 적도 있지만 교민들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현으로 두었다. 산천이 바다를 압도하고, 섬 둘레는 60 리이며, 옛 현의 기반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본 왕조에서 배출된 인물로 정수곤(丁壽崑)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교리에 이르렀고,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해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이 사망하였다. 정수강(丁壽崗)은 수곤의 아우로 천성이 청렴 겸손하고,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또 관운공(觀雲公 丁時傑)께서 쓰신 <속적변(屬籍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압해(押海)는 호남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읍(邑)의 이름인데, 이를 압해(壓海)라고도 쓴다. 신라 때는 실제로 군치(郡治)였으나 고려조로 내려와서 처음으로 군을 폐하고 영광으로 예속시켰다가, 후에 다시 나주에 예속시켰으며, 본 왕조에서는 이에 따라서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정씨는 원래 압해 출신이며, 압해는 바로 나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에 근거하여 말하더라도, 압해는 실제로 나주 땅이므로 나주를 취해서 관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실로 안 될 것은 없다. 다만 주현(州縣)의 연혁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훗날 만약에 압해가 다시 예속이 폐지되고 군치로 바뀐다든가 혹은 또 다른 군에 예속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주와는 상관이 없어지게 된다. 그때는 후손들이 이미 나주의 관적으로 습관이 되었는데, 다시금 압해의 옛 관적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마도 세대가 더욱 멀어지면 압해가 옛 관적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종(吾宗)은 압해 말고도 영광 정씨가 있어 그들도 또한 명족이다. 영광 정씨들은 말하기를 애초에 정씨는 압해에서 나왔고, 그때 한 아들이 분리되어 영광으로 와서 살았기 때문에 영광 정씨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설은 고증된 바도 없고 근거할만한 것도 없다. 다만 영광과 압해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럴 듯하게 들릴 뿐이다. 대개 압해는 일찍이 영광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압해가 영광에 속하게 되자 영광을 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손 상승(相承)에 그 내력을 알지 못하고, 이에 분거(分居)해서 관적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오늘날 오종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여 마치 영광 정씨들이 압해는 잊어버리고 영광을 얻어, 오직 영광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분거해서 관적이 되었다고 하거나 또는 이거(移居)하여 관적을 얻었다고 하면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이러한 인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문중 종인들이 직접적으로 압해를 관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압해를 관적으로 하게 되면 비록 백 번의 연혁(沿革)에도 압해는 곧 압해 그대로 남아 무사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근자에 우연히 문환(文煥)이 지은《문씨보(文氏譜)》를 얻어 보았더니 그 속적(屬籍)의 잘못이 마침 내가 의심하는 바와 서로 부합했다. 무릇 문씨는 관적이 철야(鐵冶)로 되어 있다. 철야는 옛날에는 능성(綾城)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또 남평(南平)에 속하였다. 그 후에 와서 자손들은 능성과 남평 두 현으로 나뉘어 관적을 갖고, 철야 문씨는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이 전례를 거울삼을 만하다. 혹시 폐읍된 지명을 관적으로 부르기를 꺼려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해평 윤씨, 풍산 김씨, 덕수 이씨 등 이와 같은 성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의 관적이 어찌 다 오늘의 읍명(邑名)이겠는가?”
또 두호공(斗湖公) 정시윤(丁時潤)께서는 압해도 성묘를 마치고 <압해도 성묘기를(押海島省墓記)>를 지으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압해도는 고현(古縣)으로 지금은 나주에 속한다. 현의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정씨의 시조 이하 5-6 대 선조의 분묘가 있다. 산은 삼강(三岡)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강의 큰 무덤을 토박이 사람들은 정정승의 묘라고 전해 왔고, 그 동리의 이름을 정승동이라고 한다.
현의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는 봉수산이 있고, 그 산 아래 일구(一區)의 정씨 묘가 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는 조수의 경치가 어울리고 줄지어 빛나는 별을 지계(地界)로 하고 있다. 대개 이 산맥은 다경포의 동쪽 나루터에서 바다로 수리를 들어가서 우뚝 솟아나 섬이 되었고, 가지가 생겨나고 잎이 돋아나 듯 일어난 것도 있고 엎드린 것도 있다. 그 중에 가지가 비틀거리듯 굽어져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6-7리쯤 되는 곳에 특별히 솟아 있는 한 봉우리가 있어 이를 홀산(笏山)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서남쪽에 있는 것은 봉수산이고, 서북쪽에는 여러 봉우리가 솟아나 기세가 제일 웅장하다. 그것이 가린관(佳隣串, 마을 이름)에 이르면 마치 새 날개를 크게 펼친 듯한데, 그 서쪽에 높이 솟은 산을 면전산(綿田山)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바로 정승묘의 외안산(外案山)이다. 그 서쪽으로 또 한 가지가 높이 솟아 봉우리가 되었는데 이를 단산(團山)이라고 하고, 이 산이 바로 정승묘의 내안산(內案山)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남쪽에서 서쪽으로 높이 솟아 성산(城山)이 되었고, 또 예쁜 산 몇 봉우리가 바다를 잘라서 마치 성곽처럼 정승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그 중간은 바다이다.
내가 임신(1962)년 가을(康熙 31년, 숙종 18년)에 재상경차관(灾傷敬差官)으로 호남지방에 출장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12월 11일에 (압해도)성묘를 하였다. 이 때 여러 군현의 정씨들 다수가 함께 참여하였다. 지주(地主) 격인 나주목사 허지(許墀), 함평재 심방(沈枋), 무안재 안준유(安俊孺)가 각각 제수를 보내왔다. 이렇게 성황을 이룬 것은 모두 임금님의 은혜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압해는 서남해 안에 위치한 아름답고 작은 섬으로 우리 나주정씨의 관적지(貫籍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지금은 관적도 나주로 바뀌었고, 더더욱 안타깝고 민망한 것은 그곳에서 시조 이하 여러 대의 분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관운공의 말씀대로 나주를 본적으로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러나 압해로 본적을 되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이제 와서 그 문제를 제기한다면 행정적 절차라든가 또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꾸어야 하는 데에 따른 불편과 어려움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관적지에 대한 유래만은 분명히 알아두되,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나주정씨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②덕수(德水) |
압해(押海)에 이어서 다음으로 오래된 우리의 세거지는 덕수(德水)이다. 시조 이후 제 7세조(휘 元甫)는 검교호군이란 비교적 낮은 직책을 얻어서 처음으로 압해에서 그 당시의 서울이던 송경(松京, 즉 開城)의 남부에 위치한 작은 고을 덕수(德水)로 옮겨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3남 7녀를 낳고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고 그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술선록》에 의하면 관운공(觀雲公, 휘 時傑)이 일찍이 여러 문중의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선세(先世)의 분묘가 실제로 덕수에 소재(所在)한다고 했으나 끝내 그곳을 알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 당시에 이미 분산(墳山)을 실전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지금은 남북이 가로 막혀 오갈 수도 없는 형편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③배천 강서(白川 江西) |
강서는 황해도 배천 전포(錢浦)의 물가에 있고, 지명은 지혜동(智惠洞)이다. 강서사(江西寺)로부터 5-6리 남짓 떨어져 있고, 국세(局勢)가 엷고 물가이다. 이곳은 세장지 즉 선영으로 전해오는데, 거기에 세거지가 함께 있었는지 아니면 좀 멀리 떨어져서 세거지가 있었는지는 지금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술선록》에 의하면, 이곳 강서 선영의 형상은 청룡의 외각이 포중으로 들어와 잠겨있고, 묘의 앞으로는 조수(潮水)가 드나들며, 절 뒤의 산봉우리는 원만히 우뚝 솟아 묘정(墓庭)을 호위하고 있어, 역시 문을 막고 파도의 출입구를 굳게 잠그고 있는 형상을 짓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천군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절 앞에 이르러서는 포(浦)와 합쳐지니 이곳이 곧 두 줄기 물이 만나는 곳으로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강서에는 제 9세조(휘 安景)과 배(配) 반부인(潘夫人), 그리고 제 10세조(휘 衍)가 모두 여기에 묻혀 있다. 나중에 관운공의 조고(祖考, 휘 好敬)와 부인 정씨(鄭氏)도 역시 여기에 묻혔다.
또《술선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평시에 산내(山內)에 묘전(墓田)을 마련해 두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난리를 겪는 동안 절의 승려가 이를 차지하여 강제로 사위토(寺位土)로 삼아버렸는데, 내 아우 시술(時述)이 기해년 겨울에 관가에 고소하여 다시금 묘전으로 복구시켜 놓았다.” “시술이 이 송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해년에 군수 윤상(尹商)이 도사(都事) 홍주삼(洪柱三)에게 말해서, 동시에 직접 심문(審問)하고 측량하여, 밭은 묘(墓)에 귀속시키도록 결판을 내리고, 또 승인(僧人)이 짓고 있던 위전(位田)에 대해서는 실상을 조사하여 절로 돌려주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④배천 율학(白川 栗壑) |
율학도 세장지 즉 선영이다. 율학은 전포(錢浦)의 하류, 벽란(碧瀾) 나루의 서쪽에 있고, 나루에서 10리 거리에 있다. 역시 《술선록》의 기록에 의하면, 오른 쪽에는 정명사(正明寺)가 있고, 앞으로는 봉수봉(烽燧峰)을 대하고 있는데 그 활 모양으로 휘돌아 감긴 산세는 강서(江西) 묘지와 대략 비슷하다고 했다.
그리고 강서와 율학 두 길지(吉地)는 정명사의 상인(上人)이 내리신 땅으로, 그 일화가 《술선록》의 기문(記聞) 중에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제10세조 휘 衍)이 배천의 용청방에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송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낭을 휴대하고 길가에 서 있는 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정명사에 사는데 절로 돌아가려고 한다면서 그 담낭을 공의 짐 속에 잠시 맡기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바로 받아서 짐 속에 실어주었다. 그리고 벽란도까지 함께 갔다. 물을 건너서는 두 길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음으로 공은 담낭을 돌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이 하는 말이 “여기서 절까지는 7 리도 못 남았는데 절문 앞까지는 가져다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해서 공은 또 그의 말대로 가져다주었다. 절 앞에 이르러 공은 담낭을 내어주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은 “날도 곧 저무니 공께서는 우리 승방에서 하룻밤 쉬어서 내일 새벽에 떠나도 좋을 텐데요.” 하면서 은근히 붙잡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머물게 되었고, 스님은 공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공에게 말하였다. “담낭을 부탁한 것은 그저 시험해본 것일 뿐입니다. 빈도는 감여술을 좀 익혔는데 이 부근에 명당이 있기에 덕망 있는 분이 나타나면 드리고자 했습니다. 조금 전 길에서 공을 시험한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도 시험해 보았지만 두 번씩이나 곤욕만 당하였지 공처럼 담아서 가져다준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며, 공께서는 절까지 가져다주었으니 덕망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바로 이야기했던 명당자리를 가르쳐주었다. 지금의 율학장지가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공의 부인 이씨, 영(令), 교리(校理)가 모두 이곳에 매장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강서도 역시 이 스님이 지정해준 묘지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공은 부인과 두 곳으로 나뉘어 매장되었다고 한다. 《수촌록》에 의하면 강서와 율학은 30리 남짓 떨어져 있는데, 토착민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어떤 스님이 두 곳을 지적해준 것이라고 했다.”
율학에는 10세조(諱 衍)와 부인 이씨, 소격서령(昭格署令, 휘 子伋)과 부인 황씨 및 교리공(校理公, 휘 壽崑)이 모두 여기에 묻혀 있다. 벽란도(碧瀾渡)에서 정명사까지는 10여 리 거리이고, 강서와 율학 사이는 20여 리 떨어져 있다. 훗날 호제(好悌)와 그 부인 유씨(兪氏) 이씨, 그리고 언경(彦瓊) 언성(彦珹) 등 조상들이 모두 이 산내(山內)에 매장되었다.
⑤토당(土堂)과 무원(茂院) |
토당과 무원은 실은 이미 없어진 세장지다. 1988년 10월 경기도 고양시 토당 무원에 있던 우리 선영이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수용됨에 따라 그 곳에 있던 우리 선조들의 18기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양지에 있는 제일리로 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세장지에 관한 것을 자손으로서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두 곳의 옛 모습을 《술선록》의 기록을 참고하여 소개해두고자 한다.
이 두 선영은 고양(高陽) 관내 행주(幸州)의 남쪽, 도당산(都堂山) 아래에 있다. 산세(山勢)는 한이산(漢妳山)에서 뻗어나 10여 리쯤에서 여석현(礪石峴)을 지나고, 또 몇 리를 가면 성라산(星羅山)이다. 거기서 또 10여 리를 가서 소장현(少壯峴)을 지나면 곧 활처럼 굽어지고 오른 쪽으로 돌면 문득 성봉(星峰)이 솟았는데 이것이 도당산(都堂山)이다. 도당산의 서쪽이 토당(土堂)이고, 동쪽은 무원(茂院)으로 양 국세(局勢)로 나뉘어져 있다.
《술선록》에 의하면, 토당에는 월헌공(月軒公)과 부인 김씨의 쌍묘가 있었고, 진좌(辰坐) 술향(戌向)이었으며, 많은 자손들이 따라서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즉 “옥경(玉卿)과 부인 박씨, 응허(應虛)와 부인 권씨, 윤지(胤祉)와 부인 홍씨, 호서(好恕)와 부인 신씨(申氏)”가 다 여기에 매장되어 있었다.
무원에는 공안공(恭安公)과 부인 김씨가 합장되어 있고, 이상공(二相公)과 부인 송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모두 미좌(未坐) 축향(丑向)이며, 많은 자손들이 따라서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윤조(胤祚)와 부인 윤씨, 윤우(胤祐)와 부인 심씨(沈氏), 호인(好仁)과 부인 신씨(申氏) 한씨, 호약(好約)과 부인 김씨, 호예(好禮)와 부인 이씨, 호겸(好謙)과 부인 안씨, 호양(好讓)과 부인 김씨, 호근(好謹)과 부인 윤씨, 시설(時卨)과 부인 이씨”가 다 여기에 매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부의 도시구획 정리사업으로 지금은 용인시 제일리 산37-1번지 임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⑥광주의 낙생(廣州樂生) |
광주(廣州)의 남쪽 낙생리(樂生里)에 있고, 주(州)에서 40여 리의 거리이다. 용세(龍勢)는 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내려와, 묘역으로 들어올 때 먼저 산협을 지나는 곳이 바로 서울 한양에서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큰길이다. 그 이름은 유현(楡峴)이고 협곡을 지나면 문득 솟아나서 주봉(主峰)이 되는데 그 주봉으로부터 점차 엎어져 차츰 내려오면서 4-5 번쯤 꺾이면 바로 신좌(申坐) 인향(寅向)의 언덕으로, 즉 감사공(監司公)과 부인 정씨(鄭氏)가 합장되어 있는 곳이다. 묘 앞 냇물은 탄천(炭川)이며, 청룡의 어깨 이름은 자은유이현(慈隱踰伊峴)이고, 그 고개를 넘어 고개 서쪽이 바로 판교(板橋)의 대촌(大村)이다.
⑦충주의 단월(忠州丹月) |
단월 선영을 《술선록》의 기록을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단월은 충주의 남쪽 10리 남짓 지나, 달천수(達川水)의 동쪽, 주지원(注之院)의 북쪽에 있다. 산세(山勢)는 주룡(州龍)으로부터 맥(脉)이 나누어져서 내려와 달천에 이르러 회결(回結)된 곳이다. 막 묘역으로 들어오려는 곳은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북서쪽으로 떨어지면서 형세가 활처럼 굽어 돌 때, 목을 막은 듯 조용히 협곡을 지나면 연거푸 몇 봉우리가 솟아,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지만,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묘터가 이루어지고, 용이 고개를 돌려 조상을 돌아보는 형세가 되어 있다. 유좌(酉坐)에 묘향(卯向)이다. 여기에는 관운공의 선고(先考) 감찰부군과 선비(先妣) 남씨의 두 방 한 무덤의 합장이 있다. 뒤에 둘러싸인 장막은 주봉이 끝나기 전에 멈춘다. 국내(局內)에서는 손진(巽辰: 손은 동남 사이, 진은 동동남. 역자주) 방향의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앞서 우뚝 솟았다고 말한 산으로 실조산(實祖山)이다. 주봉은 단아하면서 그렇게 높지 않고, 백호가 끝나는 곳에는 돌이 있어 햇빛에 빛나고, 손사(巽巳: 동남방향. 역자주) 방향에서 물이 흘러나와, 돌아서 사방(巳方: 정남에서 동으로 30도 방향. 역자주)으로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달천수(達川水)다. 동남쪽으로 물이 보이는 곳이 바로 높은 절로 올라가는 돌길로 제법 험한 조령(鳥嶺)의 대로이다. 단월역(丹月驛)은 서쪽으로 1리 남짓한 곳에 있고, 주지원(注之院)은 옛날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는데, 그 유지(遺址)는 바로 묘역 위에서 보인다. 다만 주지(注之)와 단월(丹月)은 주(州)로부터 공히 10리 거리에 있었으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단월은 주(州)에서 10리이고, 주지원은 16리라고 한 것을 보면, 주지원은 옛날에는 좀 멀리 있다가 후에 이곳으로 옮겨왔음을 뜻하지만 여전히 유지로 남고 말았다.
이상 관적지인 압해, 즉 첫 번째 선영을 비롯한 일곱 군데의 선영을 제외하고, 근자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우리 나주정씨의 세거지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 세장지도 많이 불어났는데, 국내 여러 곳에 있는 선영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충북 음성군 원남면의 조촌리
2)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면 부제곡
3)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대야리
4)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5)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6) 경기도 용인 포곡면 전대리 부곡
7)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동
8) 충남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북록
9)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사악
10) 충남 천안시 불당동 후록
11) 경북 울산군 두서면 복안리
12)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양상리
13)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14)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관산리
15) 경북 청도군 금천면 동곡동 선자등
16) 경북 문경군 갈벌 탑거리
17)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 곡촌
18)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학의리 필동
19) 경기도 개성군 서면 광정리
20)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선도동
21) 경북 영주시 상줄동 금당
22) 경북 영주시 상줄동 여아
23)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야동리
24)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무송리
25)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유리
26)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후포리
27)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28) 경북 예천군 감천면 궁현동
29) 경북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
30) 충남 서천군 화양면 기복리, 대하리
31)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 개치동
32)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마현
이 중에서 경기도 고양시 지도면 일대에 있던 분묘는 지난 1988년에 도시계획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모두 경기도 양지(陽智)의 제일리(霽日里)로 이장하였다. 제일리에는 그 해 대규모의 선영(先塋)을 새롭게 조성하여 시조의 제단을 위시하여 월헌공 정수강(丁壽崗), 문화공 정옥경(丁玉卿), 공안공 정옥형(丁玉亨), 첨정공 정옥정(丁玉精), 참봉공 정응허(丁應虛), 충정공 정응두(丁應斗), 우봉공 정윤지(丁胤祉), 전첨공 정윤조(丁胤祚), 병사공 정호서(丁好恕), 별제공 정호인(丁好仁)과 그 배위를 다 함께 모셔 놓았다. 그래서 나주정씨의 또 하나 새로운 선영(先塋), 즉 영적(靈的)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