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 선계위원회 발족과 향후과제
나주정씨 대종회가 주도하고 월헌공파종회의 적극 참여로 대종회 산하 선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미 나주정씨 월헌공파종회에서는 2002년 《나주정씨선계연구》를 간행하여 선계문제에 대한 명확한 학술적 근거에 의한 판단을 내린 바 있다.
그 연구의 결과와 향후 과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덕성(丁德盛) 제정씨(諸丁氏) 시조설(始祖說) |
정덕성 제정씨 시조설은 1692년 이후 나오기 시작하여 1701년 최초의 문건으로는 《영광정씨재신사보》에 정치형(丁致亨)이 글로 나타내었다. 그 후 위서(僞書) 사보(私譜) 등에 의하여 수정과 확장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나주정씨 시조 정윤종(丁允宗)의 윗대를 정덕성에 이르기까지 확대하고, 정윤종을 그 윗대의 차자로 자리매김 하는 등, 해당 문중으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정덕성 시조설은 근거 없는 망설이고, 정덕성은 당(唐)나라 때 존재한 일이 없는 허구의 소설속 인물이다.
당 원화10년 을미진사 30인(唐元和十年乙未進士三十人)이란 명단에 정덕성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누군지 모를 사람이 조작한 위작 명단임이 판명되었다. 청(淸)나라 고증학자 서송(徐松)의 《등과기고(登科記考)》에 수록된 기록에는 14명 뿐인 것을 전혀 아무런 근거없이 16명을 추가하여 30인 명단으로 확대 날조하고 그 안에 정덕성의 이름을 끼워 넣는 수작을 부려 정덕성 당진사설(唐進士說)에 진실성을 부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증에 의하여 어이없는 날조로 판명되어 일장촌극으로 끝났다. 후안무치한 행위이다. 이는 정덕성전정씨시조설(丁德盛全丁氏始祖說)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마련된 위서 위보 속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정씨의 시조는 정덕성이 아니고, 각기 족보에 명시한 대로
나주정씨 시조는 고려조 정윤종
의성정씨 시조는 고려조 정영손
창원정씨 시조는 고려조 정연방/정관
영광정씨 시조는 고려조 정진
으로 되어 있다. 초기의 족보 그 어디에도 정덕성(丁德盛)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을 내세워 도시조(都始祖)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으며, 허무맹랑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각각의 정씨들은 각자의 시조를 모시고 살아가길 바란다.
2. 압해도(押海島) 정승동(政丞洞) 승상묘(丞相墓) |
압해도 정승동 승상묘는 오래전에 실전된 나주정씨 선조의 분묘(墳墓)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정할 증거가 없고 정덕성(丁德盛)의 묘일 수는 더더욱 없다. 정덕성은 조작된 소설 속의 인물 일뿐 압해도에 있을 수 없다.
나주정씨 시조 이하 6대의 묘가 압해에서 실전된 사실에 비추어 이들의 묘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이 또한 증거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다. 압해도 승상묘의 묘주는 실전된 나주정씨 선조묘의 묘로 추정될 뿐 정덕성의 묘는 아니고, 그 어느 것도 묘주가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압해도 정승동에 있는 묘들은 묘주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나주정씨의 먼 선조가 매장된 곳이므로 우리의 선조들은 기회 있으면 참배를 하여왔던 것이다. 정시윤(丁時潤)공이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전라도에 갔다가 압해도를 방문하여 성묘기를 남긴 일도 그 한 예이다. 나주정씨의 후손들은 압해를 가문의 발상지로 인식을 정확히 하되 사실과 증거 없는 위설(僞說)에 현혹되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한 허구와 날조된 위설과 위보(僞譜)를 추종하는 잘못을 금해야 할 것이다. 압해는 나주정씨의 발상지이다.
3. 진주(晉州) 석갑산(石岬山) 고분군(古墳群) 석각변개사건(石刻變改事件) |
진주시 평거동(平居洞) 석갑산에 고려시대 고분으로 알려진 6기(基)가 있다. 1729년 낭혜(朗慧)라는 요승(妖僧)이 석갑산에 나주정씨의 시조 정윤종(丁允宗)과 손자 정량(丁良)의 묘와 정덕성(丁德盛) 허구세계에 나오는 정열(丁悅)ㆍ정변(丁㭓)ㆍ정윤화(丁允樺)ㆍ정언진(丁彦眞)의 묘를 함께 발견했다고 정약용(丁若鏞)의 증조부인 정항신(丁恒愼)에게 마재까지 와서 고하게 되어 사건이 시작된다.
압해도에서 실전된 것으로 알고 있던 시조의 묘가 진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명문세가의 반열에 있는 양반집안의 실전되었던 시조의 묘군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엄청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4대에 걸친 다산(茶山) 일가의 석갑산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항신은 낭혜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후 3년 만에 타계한다. 그러나 정항신은 아들인 정지해(丁志諧)에게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여 전하고, 그의 아들이며 다산의 조부인 정지해는 소식을 접한 뒤 19년이 지나 진주 석갑산 탐구조사를 행하고 자세한 조사기록을 남긴다. 이때가 1748년의 일이다. 1790년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진주목사로 재임시 정다산은 진주를 찾아 부친 정재원 목사공과 함께 석갑산 고분군을 답사하고 <진주석갑산정씨분산변(晉州石岬山丁氏墳山辨)>과 <석갑산정씨육총변(石岬山丁氏六塚辨)>을 남긴다. 3대에 걸쳐 고뇌와 논증 끝에 결론은 “석갑산의 여섯 무덤은 정씨의 것이 아니다.”였다.
압해현(押海縣)에 세거했던 나주정씨 선조의 무덤이 진주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사실이다. 진주(晉州)와 정씨(丁氏)는 아무런 연고도 찾을 길이 없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나주정씨 선계연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는 상당수의 정씨들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석갑산 고분을 찾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어느 귀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무덤을 제 선조인 듯 착각하고 참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정확한 사실이 널리 전파되어 하루 속히 잘못된 관행이 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석갑산 고려고분이 정씨의 분묘가 아닌 것은 밝혀졌지만, 참된 묘주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 때 분묘임을 이유로 사적지정을 결정한 심사위는 정다산 일가의 기록을 간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분의 비문이 개각 변개되었던 사실도 간과되었다. 당시의 회의록은 고려(高麗) 때의 고분이고, 기년(紀年)이 분명하다는 것이 주요 고려 사항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기(基)의 고분이 진주와 연고 없는 정씨의 것으로 되어 있는 특이성에 대하여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사적지정은 이루어졌다. 피장자에 대한 고고학적 논증 없이 사적지정이 이루어진 것은 비정상적이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석갑산 고분은 고려조에서 한 때 번영하다 중도 몰락하여 쇠퇴한 가문의 분묘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전 영남대명예교수 고 이수건(李樹健)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진주 석갑산 6총은 고고학자 김원룡 등에 의해 고려 고분으로 인정하고 1968년 사적제164호로 지정된 바 있다. 필자도 2001년 6월 30일 현지답사를 하였고, 겸하여 조선조에 조성된 진주시 소재 하륜의 선대분묘와 하륜묘도 답사하면서 양자를 비교 검토해 본 결과 그 고총 6기는 고려시대 진주지방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던 어느 토성 인물들의 분묘로 짐작된다. 진주 강(姜)ㆍ하(河)ㆍ정(鄭)씨들은 여말(麗末) 선초(鮮初) 족세가 강성하여 선조묘소를 잘 돌본 반면 진주류씨(晉州柳氏)는 최씨정권 최충헌(崔忠獻)의 외가로 그 외조가 류정(중서령상장군)이며 진주는 최충헌의 식읍(食邑)이 되는 등 류씨는 한 때 권세를 부렸다가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도태되었으니 그 고총은 류씨 선조의 분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정다산이 현장 답사 끝에 ‘석갑산6총은 정씨의 장이 아니다.’라고 단정했듯이, 필자도 압해 정씨 시조인 정윤종의 묘는 본관 압해현 내에 있지, 결코 아무 연고가 없는 석갑산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석갑산에 관한 진실의 절반(정씨의 무덤이 아니다.)은 규명되었다. 남은 절반의 진실은 묘주가 어느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일 것이다. 또한 더 큰 과제는 ‘엉뚱한 남의 묘에 가서 허리 조아리며 참배하고 있는 무지몽매하고 가련한 무리들을 여하히 계몽하느냐’ 일 것이다. 진실에 입각한 올바른 선계인식의 간파만이 해결의 길일 것이다.
석갑산 고분군의 묘주는 정씨가 아니다. 석갑산에 참배하는 정씨들은 엉뚱한 남의 무덤에 절하러 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문화재 관련자들은 사적 164호가 1700년대 초에 개각 변조된 사실을 조사하고, 이 고려 고분의 진짜 묘주가 누구인지 밝혀냄으로써 사적의 진가를 되찾아야 할 것이며, 진주 석갑산 고분의 묘주를 되찾고 개각 훼손된 이전의 본 모습을 되찾는 일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