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개요
나주(압해)정씨는 고려(高麗)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정윤종(丁允宗)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가문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조선조에 들어서서 대대로 청요 현관과 문인 달사를 배출하여 문한가로 명성을 떨치던 가문이었다. 그런데 1693년에서부터 1701년 사이 관향(貫鄕) 압해도에 있던 정씨의 무덤으로 알려져 오던 한 고분의 피장자가 정덕성(丁德盛)이라고 주장하며 그가 국내 모든 정씨(압해정씨ㆍ창원정씨ㆍ남원정씨ㆍ영광정씨ㆍ의성정씨를 포함한)의 시조라는 설[都始祖說]이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관을 달리하는 정씨의 일부 족보에 정덕성(丁德盛) 이하 십여 대의 세계가 갑자기 출현하고, 나주(압해)정씨 일문의 동의 없이 나주(압해)정씨가 시조로 삼아오던 정윤종(丁允宗)을 세계(世系)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정경(丁瓊)의 차자(次子)로 배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진실 여부는 나주(압해)정씨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에 따르면 대양군(大陽君) 정덕성이라는 인물은 당(唐)나라 문종(文宗)ㆍ무종(武宗) 연간에 대승상(大丞相)을 역임하고 신라(新羅) 문성왕(文成王) 때 신라 땅 압해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죽어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월헌첩(月軒帖)》ㆍ《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ㆍ《순천보(順天譜)》를 이어서 편찬된 역대 우리 족보에서 단 한 번도 소위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을 기재하거나 시인한 적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타성 정씨 최초로 발간된 족보에도 소위 대양군 정덕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모든 정씨의 족보 가운데서 가장 일찍 발간된 《창원정씨족보》는 1551년(명종6) 유헌(遊軒) 정황(丁熿) 선생의 소찬(所撰)인데, 거기에는 시조를 신라군장 정광현(丁光顯 혹은 丁光純)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1599년(선조32)에 간행된 《영광정씨족보》는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선생의 소찬이다. 이 족보도 그 연대가 우리의 관운공(휘 時傑)께서 쓰신 《술선록(述先錄)》의 1660년보다도 61년이나 앞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도 시조는 고려시대의 정진(丁晉)으로 되어 있고, 그 자신이 시조로부터 10대손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 뿐, 대양군 정덕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0년 초에 난데없이 자신들의 족보는 믿지 않고 갑자기 어떤 호사자가 나타나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사보(私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압해ㆍ영광ㆍ창원 등 그 당시 한반도에 살고 있던 모든 정씨들의 시조 위에 당나라에서 귀양살이 왔다는 소위 대양군 정덕성(丁德盛)이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도시조로 삼고, 무려 수백 년을 1인 1대 세대로 꿰어 맞추어 놓았다. 없는 인물을 가공 미화해서 최고의 관작과 영예와 상훈을 과분하게 분장시키다 보니 진실은 간데없고 허구허식만 증폭되어 그 누가 보더라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적 왜곡물이요 소설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의 족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질 나쁜 호사자의 작란거리가 되어서, 조상이 다른 정씨들 간에 서로 조상문제를 가지고 그 뒤 300여 년을 내려오면서 분쟁의 불씨가 될 줄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대해 당대의 대학자였던 해좌공(海左公, 휘 範祖)은 <정승정공묘비음기(政丞丁公墓碑陰記)>ㆍ<답종인서(答宗人書)>를, 다산공(茶山公, 휘 若鏞)은 <정승묘변(政丞墓辨)>이라는 문장을 통해서 대양군에 관한 전설을 극구 부인 변증하는 글을 쓰신 일이 있다. 즉 다산의 입장과 변파는 명쾌하다. 무징불신(無徵不信)이다. 전설의 정덕성설 속의 정승설과 피장자가 당나라 선종 때의 승상이며 죄를 지어 신라로 귀양 와서 압해도에서 죽어 묻힌 정덕성이라는 설은 전혀 역사속의 근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정범진(丁範鎭) 전 성균관대 총장의 <당원화십년을미진사삽십인(唐元和十年乙未進士三十人) 명단의 허구성(虛構性)과 정덕성(丁德盛)에 대하여>(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311-343쪽)와 김언종(金彦鍾) 교수의 <압해정씨 가계무구 변파(押海丁氏 家系誣構 辨破)>(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101-159쪽)란 논문에서 사적(史的) 오류 및 정덕성설 그 자체 내에서의 모순을 모두 규명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는 다 그들의 시조를 모시고 있다. 대체로 고려시대가 아니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그 시조 위에는 부모나 조상이 없었겠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다 그 위의 조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제일 앞선 시대의 인물이 바로 그들의 시조인 것이다. 우리 나주정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검교대장군 시조 할아버지 이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계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으며, 당연히 역사상에 기록도 없다. 그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 억측이나 가설을 꾸며서 아무리 수백 년 수십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시조를 설정해 놓은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또한 무슨 큰 광영(光榮)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는 조상만을 섬기는 것이다. 확실히 알고 있는 조상이라면 못났던 잘났던 당연히 자손들이 있는 그대로 모셔야 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인 것이다. 창피하다고 포의(布衣)를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조작하거나, 또는 서민을 왕실근친(王室近親)으로 멋대로 미화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과장하고 미화시킨다고 해서 지금 세상에서 그 누가 더 대단히 알아주겠는가? 도리어 웃음거리만 되고 말 것이다.
어쨌든 역시 역사적인 사실은 믿을 수 있는 사료(史料)와 엄격한 고증을 통해서만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지, 위작된 자료나 무모한 억지 주장이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백히 알고 있으며, 이 후로도 그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으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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