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석갑산 문제

전체 개요

 

1729년에 요승 낭혜(朗慧)가 마현(馬峴)을 방문해 다산(茶山)의 증조부 정항신(丁恒愼)에게 진주 촉석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석갑산 자락에 압해정씨의 시조(始祖)인 정윤종(丁允宗)을 비롯한 6기의 조상 묘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하였다.

여섯 기는 정열(丁悅), 정윤화(丁允樺), 정윤종(丁允宗), 정언진(丁彦眞), 정변(丁㭓), 정량(丁良)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낭혜의 주장에 의하면 정열은 정윤종의 증조부이며, 정변은 조부, 정윤화는 형이며 나주(압해)정씨의 족보에 보이는 정량, 그러니까 정윤종 공 손자의 무덤까지도 실재한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다산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시조(始祖) 정윤종(丁允宗), 2세 정혁재(丁奕材), 3세 정량(丁良), 4세 정신(丁信), 5세 정준(丁俊), 6세 정공일(丁公逸)의 묘는 원적지(原籍地)인 압해도(押海島)에서, 7세 정원보(丁元甫), 8세 정세(丁世)의 묘는 족보상 최초의 이거지(移居地)인 개성(開城) 일대에서 실전(失傳)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 다산의 증조부 정항신(丁恒愼, 1691-1733)이 39세, 조부 정지해(丁志諧, 1712-1756)가 18세였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은 태어나기 한 해 전이다.

 

이에 충격이 적지 않았을 정항신(丁恒愼)은 전문(傳聞)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4년 후 1733년에 사망하였다. 그를 이어 아들 정지해(丁志諧)는 전문한 지 19년 후인 1748년에 진주 석갑산(石岬山)을 직접 답사하였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또 아들 정재원(丁載遠)도 진주목사로 재임시 1791년(정조 15년) 진주를 찾은 다산과 함께 석갑산 고분군을 답사하고 <진주석갑산정씨분산변(晉州石岬山丁氏墳山辨)>과 <석갑산정씨육총변(石岬山丁氏六塚辨)>을 남겼다.

 

다산가(茶山家)는 무덤의 당시 상태를 하나하나 정밀하게 검토하고 뿐만 아니라 석각(石刻)의 글자 숫자까지 밝히는 등 치밀한 판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여섯 무덤은 조상들의 묘역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씨의 묘역도 아니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는 석갑산 육총이 그만큼 변조 훼손이 심해 불신을 사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신천식(申千湜) 교수가 《진주 평거동 고려고분군 연구(晉州 平居洞 高麗古墳群 硏究)》(경인문화사 서울, 2002. 03)에서 명문 검토를 거쳐 모든 사실이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개각 변조된 것임을 밝혔고, 김언종(金彦鍾) 교수도 <압해정씨 가계무구 변파(押海丁氏 家系誣構 辨破)>(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101-159쪽)에서 기물에 새겨진 내용과 각자(刻字)의 마모(磨耗)된 정도까지 언급, 일일이 지적하면서 그 날조된 사실을 논증하였다.

 

압해현(押海縣)에 세거했던 나주정씨 선조의 무덤이 진주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사실이다. 진주(晉州)와 정씨(丁氏)는 아무런 연고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는 상당수의 정씨들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석갑산 고분을 찾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어느 귀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무덤을 제 선조인 듯 착각하고 참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석갑산 고려고분이 정씨의 분묘가 아닌 것은 밝혀졌지만, 참된 묘주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 때 분묘임을 이유로 사적지정(제164호)을 결정한 문화재청 심사위는 정다산(丁茶山) 일가의 기록을 간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분의 비문이 개각 변개되었던 사실도 간과되었다. 당시의 회의록은 고려(高麗) 때의 고분이고, 기년(紀年)이 분명하다는 것이 주요 고려 사항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기(基)의 고분이 진주와 연고 없는 정씨의 것으로 되어 있는 특이성에 대하여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사적지정은 이루어졌다. 피장자에 대한 고고학적 논증 없이 사적지정이 이루어진 것은 비정상적이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아울러 문화재 관련자들은 사적 164호가 1700년대 초에 개각 변조된 사실을 조사하고, 이 고려 고분의 진짜 묘주가 누구인지 밝혀냄으로써 사적의 진가를 되찾아야 할 것이며, 진주 석갑산 고분의 묘주를 되찾고 개각 훼손된 이전의 본 모습을 되찾는 일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진주석갑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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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의 개요

2. 다산가(茶山家)의 현지답사와 견해

3. 현대(現代) 학자(學者)들의 견해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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