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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의 개요 |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을 시조로 한 연면한 세계에서 가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조선조에 들어서서 대대로 청요 현관과 문인 달사를 배출하여 문한가로 명성을 떨치던 압해 정씨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러 중대한 문제 제기에 봉착하였다. 관향(貫鄕) 압해도의 민간전설에서 정씨의 무덤으로 알려져 오던 한 고분의 피장자가 정덕성이라고 그 정체를 밝히면서 그가 국내 모든 정씨(압해정씨ㆍ창원정씨ㆍ남원정씨ㆍ영광정씨ㆍ의성정씨를 포함한)의 시조라는 설이 등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관을 달리하는 정씨의 일부 족보에 정덕성(丁德盛) 이하 십여 대의 세계가 갑자기 출현하고, 압해정씨 일문의 동의 없이 압해정씨가 시조로 삼아오던 정윤종(丁允宗)을 세계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정경(丁瓊)의 차자(次子)로 배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진실 여부는 압해정씨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덕성설과 이른바 상계 세계가 대체 언제 출현하였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정치형(丁致亨)의 《영광정씨재신사보서》(170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홀연히 전라도 몇 곳에서 한 문적이 나타났는데 대양군 이하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관함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로써 본다면 문제의 ‘대양군 이하의 세계’는 현재 전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1701년 이전에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상한은 어디까지일까?
역대 가승을 모아 1660년에 정시걸(丁時傑)이 편찬한 《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의 정씨묘지 조나, 다산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이 정시걸의 글이 나온 지 32년 후인 숙종 18년 1692년에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 되어 호남에 파견되었을 때, 호남 여러 군현에 사는 정씨들의 배행하에 압해도의 이른바 정승묘를 성소(省掃)하고 돌아와 <압해도성묘기(押海島省墓記)>를 지었다. 두 글에서도 ‘당나라 대양군 승상 정덕성설’과 ‘상계 세계설’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덕성설과 이하 십여 대의 세계는, 압해도성묘기가 쓰인 1692년 이듬해 1693년에서부터 《영광정씨재신사보》가 출간되었다는 1701년 직전 해 1700년, 이 7년 사이에, ‘그 최초 날조자가 누구인지? 어디서 만든 것인지?’는 그때나 현재나 알 수 없으나, 그야말로 ‘홀연히’ 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1701년 이후에는 그 허구의 사실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