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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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나라 성씨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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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에 성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성을 가진 사람은 인구의 절반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성(姓)과 본(本 본관) 및 족보의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한국 성관의 출발인 ‘土姓’ 문제와 그 토성의 존재 양태와 분포 상태를 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하 《실지(實地)》) 성씨조를 배제시키고는 불가능하다. 15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수많은 보학자에 의해 정리된 보계서와 각 성의 본관별ㆍ파별ㆍ문중 단위로 편찬된 족보와 가승, 조상의 행장과 비문 등을 갖고 성관의 생성ㆍ유래와 족보를 연구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성을 안고 있다. 토성 문제와 《실지(實地)》 성씨조를 젖혀놓고 처음부터 잘못 인식된 성관 지식과 조작된 자료를 갖고 성과 본, 조상의 세계(世系)와 파계(派系)를 규명한다는 자체는 출발부터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토성 문제와 《실지(實地)》 성씨조를 배제한 데서, 첫째 한국의 성관 유래를 중국의 경우와 동일시한 점, 둘째 한국 성관의 주체가 토성인데도 그 시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동래설(東來說)을 강조하는 점, 셋째 특수한 몇몇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면 동성도 이본(異本)은 타성과 다름없다는 사실, 넷째 신라의 박(朴)ㆍ석(昔)ㆍ김(金) 3성과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裴)ㆍ설(薛) 6성 및 기타 귀족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성관은 모두 고려 초기에 나왔다는 점, 다섯째 중국처럼 봉후건국(封侯建國)한 데서 사성(賜姓)ㆍ수씨(受氏)한 것이 아니고 토성을 분정 받은 뒤에 공신ㆍ외척 등으로 인해 본관별로 봉작읍호(封爵邑號)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封君)됨으로써 본관을 받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성(姓)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실지(實地)》이다. 이 책을 참고해 보면 고려 초에 호족들에게 성을 나누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실지(實地)》 소재 전국 성관(姓貫) 가운데 정씨(丁氏) 본관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신녕현토성정씨ㆍ의성현촌성정씨ㆍ의창현(창원)촌성정씨ㆍ동래현토성정씨ㆍ해안현토성정씨

        ㆍ화원현(성주 속현)토성정씨ㆍ칠원현토성정씨ㆍ거창현토성정씨

전라도: 압해현(나주 속현)토성정씨ㆍ영광군토성정씨ㆍ장흥부토성정씨ㆍ가흥현(진도 속현)토성정씨ㆍ

       육창현(영광 속현)토성정씨ㆍ장사현토성정씨ㆍ무안현토성정씨ㆍ남평현토성정씨ㆍ돌산현(순천

       속현)토성정씨ㆍ태강현(고흥 속현)토성정씨ㆍ창평현토성정씨ㆍ홍농부곡(영광 소속)망성정씨ㆍ대

       곡소(금산 소속)속성정씨

황해도: 평산부토성정씨

평안도: 우예군래성정씨

 

이상과 같이 《실지》 소재 정씨 본관은 토성(土姓) 19본, 망성(亡姓) 1본, 속성(續姓) 1본, 래성(來姓) 1본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여지(輿地)》)에서는 《실지(實地)》 소재 정씨 본관을 전부 전재한 데 이어 고흥현(高興縣) 속현 두원현(荳原縣) 래성(來姓) 정씨(丁氏)가 기재되어 있으나 소자래처(所自來處)가 명시되지 않았다. 뒷날 정시걸(丁時傑)이 《압해정씨술선록》을 편찬할 때 <정씨속적총초(丁氏屬籍總抄)> 항목에서는 《실지(實地)》는 볼 수 없었고, 당시 민간에서 유포되고 있던 《여지(輿地)》 소재 정씨 본관을 전재하면서 그 정씨 20여 본을 두고 언젠가 분파ㆍ분적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실지 소재 토성 또는 촌성으로 기재된 정씨는 고려 초기 토성 분정 때 각기 개별적으로 본관이 정해졌던 것이며, 망성(亡姓)은 당초 토성에서 뒷날 유망하거나 소멸하여 없어진 성이며, 속성(續姓)과 래성(來姓)은 고려 중기 이래 본관을 떠나 타읍에 이주한 성으로 원적지가 기재되지 않았으니 그 소자래처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실지 소재 정씨 가운데 토성 또는 촌성은 당초 토성분정 때 각자 개별적인 성과 본으로서 혈연적으로 서로 무관한 것이니 같은 정씨라 하더라도 본이 다를 때는 타성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6세기말(선조 18년)에 편찬된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성씨 정씨조(丁氏條)에는 정씨 본관으로 창원ㆍ영광ㆍ나주(압해) 등 3개 본을 기재하면서 “羅州本押海縣人, 至檢校大將軍丁允宗, 遂世顯”이라 하였으니 권문해(權文海)가 당시 유전되고 있던 《월헌첩(月軒帖)》을 참고한 것 같다.

조선조 말기에 증보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씨족고(氏族攷)에 의거 정씨(丁氏) 본관을 열거해 보면 상기 《실지》 소재 본관 외에 개성ㆍ광주ㆍ여주ㆍ한양ㆍ남양ㆍ교동ㆍ청주ㆍ서산ㆍ옥천ㆍ온양ㆍ초계ㆍ의령ㆍ용궁ㆍ언양ㆍ영천ㆍ창녕ㆍ평해ㆍ정선ㆍ평창ㆍ낭천ㆍ해주ㆍ연안ㆍ안주ㆍ정주ㆍ창안(읍호미상)ㆍ남안ㆍ목성ㆍ관곡ㆍ반산 등 44개 본관이 기재되어 있다. 실지에 없는 본관이 이렇게 많이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양반 이외의 서민들은 현 거주지에 편호되어 본관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생 본관은 당시 호구 조사 자료인 각읍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조사 수록했던 것이다. 이러한 본관들은 18ㆍ19세기 이래 신분제의 해이와 신분 향상으로 양반화되면서 당초 무명의 본관을 버리고 유명 본관을 모방, 개관(改貫)ㆍ모관(冒貫)함으로써 19세기 이래 신생 본관들은 거의 소멸되어 갔다. 그러한 현상은 1985년 ‘국세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남한 만의 통계지만 정씨 본관을 순서대로 열거해 보면 총 38,000여 호 가운데 ①나주(15,000여 호), ②압해(12,000여 호), ③영광(2,000여 호), ④창원(3,000여 호), ⑤영성(2,000여 호), ⑥의성(400여 호), ⑦진주(100여 호), ⑧기타 해주ㆍ창녕ㆍ파주ㆍ장성ㆍ무안ㆍ영산ㆍ달성ㆍ곡성 등은 대개 100호 내지 50호 미만의 소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모든 성관이 현재까지도 실지 소재 군현토성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려 조선왕조 천년 동안 한국을 대표한 대성명문들은 모두 실지 소재 토성이었던 것이다. 정씨(丁氏)도 여말선초 사족으로 성장한 압해(나주)ㆍ영광ㆍ창원ㆍ의성의 4대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만 신생 본관인 진주정씨가 100여 호가 될 뿐 나머지 본관은 모두 50호 미만이었다. 그리고 실지 소재 토성 가운데 무안 정씨는 30호, 달성(해안 화원)이 9호로 나타날 뿐 나머지는 대개 16세기 이래 다른 본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한편 1930년대 통계인 《조선의 성(朝鮮の姓)》에 의거 정씨를 도별로 살펴보면, 전국 13,827호 가운데 경기도 1,114호, 충청도 1,119호, 전라도 6,554호, 경상도 2,798호, 황해도 750호, 평안도 535호, 강원도 723호, 함경도 234호이다. 이러한 수치는 바로 실지 소재 정씨 본관수와 비례하여 본관수가 많았던 전라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상도였다.

《고려사》에 의거 고려 시대 5품 이상 관직을 역임한 정씨 인물을 적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열(丁悅 현종조 친종랑장)ㆍ정황재(丁黃載 명종조 병부상서)ㆍ정공필(丁公弼 신종조 내시)ㆍ정수필(丁守弼 신종조 장군)ㆍ정광숙(丁光叙 신종조 추밀원부사)ㆍ정언진(丁彦眞 고종조 지문하성사)ㆍ정공수(丁公壽 고종조 상서우복야)ㆍ정순우(丁純祐 고종조 상장군)ㆍ정찬(丁贊 공민왕조 서북면도병마사)

 

상기와 같이 정씨(丁氏) 인물이 최초로 나타난 시기는 고려 현종 때 정열(丁悅)이며, 12세기 후반 무신집권기부터 무반계 3품 이상 고관자가 고려 말까지 7-8명이 고려사에 등장했지만, 그들의 본관을 기재했거나 증빙할 만한 자료는 최근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 후기에 위작되었다고 사료되는 ‘위보(僞譜)’와 행장(行狀)ㆍ비문(碑文 필사된 것)에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고려 말까지 정사(正史)에 기재된 정씨(丁氏) 인물로서 본관을 밝힐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 반면, 조선시대에 작성된 자료를 통해 소급 추인되는 실정이다. 고려말에 의성현(義城縣) 향리(鄕吏)의 아들로 출사하여 중견 관료가 된 정령손(丁令孫)은 17세기에 편찬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과거 합격자를 기재한 <고려조과거사적(高麗朝科擧事蹟)>에는 정성인(丁姓人)은 한 사람도 없으니 고관의 문신에는 정씨 인물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 증보된 《여지(輿地)》의 <열읍인물조>에 기재된 정씨 인물로는 나주목의 정수곤(丁壽崑)ㆍ정수강(丁壽崗) 형제와 영광군의 정극인(丁克仁)이 있을 뿐이다. 15ㆍ16세기에 와서는 《대동운부군옥》에 사족으로 기재된 압해(나주)ㆍ영광ㆍ창원 정씨가 있다. 《국조방목》에 의거 조선초-선조 때까지 정성인으로 문과 급제자를 본관별로 살펴보면 압해가 12명, 영광이 4명, 창원이 4명, 본 미상이 2명, 합계 22명이었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이수건:55-59쪽)

 

우리나라 성씨들의 유래는 대략 고려 중엽 이전으로 올라가면 아무도 그 조상이 한반도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건너왔는지 또는 일가였는지 타성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 알지 못하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은 응당 알지 못하는 사실 그대로 두고 서로 일가처럼 친척처럼 친근하게 여기면서 살면 되는 것이지 사실(史實)에 근거도 없이 조상에 관한 일을 멋대로 조작한다는 것은 자손으로서는 진정 용납 받지 못할 불효요 죄악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 친근감이나 두텁던 정마저 떨어지게 만드는 일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