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도시조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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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타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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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대표 정씨들은 나주(압해)정씨, 영광정씨, 창원정씨, 의성정씨 등이다. 이들의 최초 족보에서도 도시조설은 없었다. 그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창원정씨

모든 정씨 족보 가운데 가장 일찍 나온 것은 1551년(명종 6년) 편찬된 《창원정씨족보(昌原丁氏族譜)》이다. 이 족보의 서문은 정황(丁熿)이 썼다. 그는 정씨는 원래 창원부에서 나왔다고 했으며, 원조(遠祖)를 신라 군장 정광현(丁光顯)까지 소급하고 그 이상은 세대가 멀고 고구할 만한 명문이 없어서 슬픈 일이라고 하였다.

정황 선생(1512~1560)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1536년 찬사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병조 형조의 정랑을 지냈다. 매사에 청렴 강직 했고, 1545년(명종 1년) 수렴청정 하던 문정황후가 인종의 장사를 서두르자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예로써 시행토록 하였다. 그 이듬해 사인으로 있을 때 윤원형이 득세하자 사직하고 남원으로 낙향했다. 졸 후에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이라 했다. 저서로 《유헌집(遊軒集)》, 《장행통고(壯行通考)》 등이 있다.

그의 서문에는 정덕성(丁德盛)에 관한 사항은 일언반구도 없다.

청원정씨 중의 선창원파는 중시조를 고려때 상장군 정연방(丁衍邦)으로 하고 후창원파는 공민왕 때 정난일등공신에 오른 정관(丁寬)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2) 영광정씨

가장 오래된 《영광(성)정씨족보(靈城丁氏族譜)》는 1599년 선조 때의 것이다. 서문은 형조참의를 지낸 정경달(丁景達)이 썼다. 그는 조선 문신으로 호는 반곡(盤谷), 1570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는 선산군수로 의병을 모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과 함께 기발한 계략으로 금오산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했다. 1594년에는 이순신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이 투옥되자 유능한 장군을 죽이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그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우리 역사에 남은 훌륭한 인물이다. 그의 글에는 정덕성이라 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오로지 그가 10대손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보아 시조가 고려조의 정진(丁晉)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다. 영광정씨의 시조는 정진(丁晉)이고 그 이상은 분명하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1679년 정이대(丁履大)가 쓴 《영성정씨족보(靈城丁氏族譜)》 서문에도 소위 대양군 정덕성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701년에 정치형(丁致亨)이 이른바 재신사보(再辛巳譜)를 내면서 문헌상으로 그 서문에서 대양군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문헌의 출처에 대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홀연 경기 이남의  몇 곳에서 어떤 문적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대양군 이하 세계가 이어지고 관함이 뚜렷하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은 나머지 각파의 가승 중에 다 증안(證案)은 없다. 다만 하나의 문적이라고 해서 감히 신종(信從)하지 않는다면 제종의 합보 기약은 더욱 막연해질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을 잘 훑어보면 찬술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정씨는 일가라고 생각하고, 모든 정씨를 함께 뭉쳐서 하나로 묶는 족보를 만들어 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좋은 방법이 없어 고민 하다가 홀연히 상계가 뚜렷해서 모든 정씨를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묶어 낼 수 있는 한 문서를 발견하고, 이제야 모든 정씨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믿고, 그래서 이 문적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 제종의 합보(合譜)는 막연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정치형이 말한 문적에 대하여는 그 내력이나 출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래(傳來)되어 온 옛 문적(文蹟)이 아니라 그 무렵에 날조된 위조문서(僞書)인 것으로 보인다.

영광정씨의 시조는 정진(丁晉)이고, 정덕성은 1701년 정치형의 재신사보에 처음 나타나는 위설 속의 가공인물일 뿐이다.

 

3) 의성정씨

의성정씨(義城丁氏) 시조는  고려조 정령손(丁令孫)이다.

의성정씨는 나주압해(羅州押海), 영광(靈光), 창원(昌原) 등 제정씨와 함께 사대정성(四大丁姓)의 하나이다. 의성정씨족보는 그 시조를 고려 공민왕 때 정영손(丁令孫)으로 경산부사(京山府使)를 거처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攻臣)에 책록 되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의성정씨족보에도 정덕성은 없던 이름이고, 근대에 와서 범정씨동근동조설(汎丁氏同根同祖說)을 위하여 날조된 허구의 인물일 뿐 이다.

의성정씨 문중은 정함(丁函), 정사형(丁士亨), 정유(丁瑜)등 대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사족(名門士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