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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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덕성설과 상계 세계의 출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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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조설(都始祖說)이 일단 발설되자 지지 세력에 의해 자가발전을 거듭한다. 그 후계이자 그 확대된 상계 세계가 곧 등장한 것이다. 이 상계 세계를 유포한 세력은 정덕성설을 가공한 세력과 동일할 것이다. 정덕성설을 만든 이상 그 이하의 세계를 만들어야 그 사실화가 강화되며, 정덕성을 모태로 얼마든지 지파 부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다산의 변파도 <사보변(私譜辨)>에서 다음처럼 확대되며 부정이 강화된다.

 

호남의 정씨 가운데 일종의 사보가 있는데 이르기를 “압해 정승묘의 정승의 휘는 덕성이며 당나라 문종조의 대상으로 압해에 귀양 와서 살았고 대양군에 봉해졌으며 묘가 압해에 있다. 11세에 정열이 있었고 열은 변을 낳았고 변은 경을 낳았다” 하고는, 우리 대장군 선조(정윤종)를 경의 아래에 달아 놓고 윤화를 대장군의 백형이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승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의 속칭이다. 당나라엔 이 관직이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의 나주지에 우리 월헌공 형제와 공안공 충정공의 성명과 행실을 실었다. 동국여지승람을 만들던 당시의 습속은 본관을 중시하였다. 우리말에 이상도 정승이라 불렀다. 퇴계가 누구에겐가 준 편지에서 우리 충정공을 늘 정상(丁相)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당시에 압해의 분묘를 ‘정정승 선묘’ 즉 ‘정정승 조상묘’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방 사람들이 드디어 무덤 속의 대부를 정정승이라 높이고 혹은 대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추가하여 대양군이라 봉하기도 하였을 것이니 모두 남방의 폐속이다. 남방 사람들의 시조로서 군에 봉작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 모두 국사에 증거가 없다. 정열ㆍ정변ㆍ정경ㆍ정윤화는 모두 북방의 선적에서 전혀 증빙할 수 없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산은 정덕성과 이하 세계를 ‘정승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의 속칭’이며, ‘당나라엔 이 관직이 없었다’고 거듭 강조하며 부정한다. 정덕성설 자체의 모순을 지적하여 그 파생에 불과한 정경에 이르기까지의 이하 세계도 아울러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압해도 고분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모색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만들던 당시의 습속은 본관을 중시’하여 ‘《동국여지승람》의 나주지(羅州誌)에 우리 월헌공 형제와 공안공 충정공의 성명과 행실을 실었’으며, 또 퇴계가, ‘우리 충정공을 늘 정상이라 불렀’듯이, ‘우리말에 이상도 정승이라 불렀다’고 이 문제 관련 정시걸의 추측을 보강하면서, 정시걸의 현지 설 수록과는 다르게 ‘당시에 압해의 분묘를 정정승선묘 증 정정승 조상묘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연고로, ‘그리하여 남방 사람들이 드디어 무덤 속의 대부를 정정승이라 높이고 혹은 대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추가하여 대양군이라 봉하기도 하였을 것이니 모두 남방의 폐속’이라고 강조하였다. 폐속이라 한 것은, 이 경우뿐만 아니라 ‘남방 사람들의 시조로서 군에 봉작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모두 국사에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이 시대에 유사한 여러 날조 사례가 있었고 물의를 빚고 있었으며, 다산이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다산은 1801년에서 1818년까지 18년간이나 전라도 강진에서 적거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위에서 다산의 <사보변>에서도 일부 거론되고 있듯이, 정덕성설에 이어 본관을 달리하는 다른 정씨 일부 족보에 정덕성을 시조로 하고 정윤종을 정경이란 사람의 차자로 하는 상계 세계가 등장하였다. 18세기초부터 일부 정씨의 족보에 등재된 이래 여러 번의 조정과 논란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2대가 첨가되어 확정된 것으로 보이는 그 세계는 아래와 같다. 2대가 첨가되었음은 다산이 본 자료에 의하며 정덕성의 14대였던 정윤종이, 오늘날 범정씨동근동조설을 지지하는 정씨들이 편찬한 족보에서는 16대로 배정되어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덕성 2. 응도 3. 필진 4. 丙曬 5. 언주 6. 광현 7. 우0 8. 지백 9. 愼煖 10. 윤하

11. 남만 12. 성휘 13. 열 14. 변 15. 경 (이상이 이른바 상계 세계) 16. 윤화, 윤종

 

이제 우리는 늦게야 확정(?)된 이 계보와 같지는 않았겠지만 정덕성설과 이른바 상계 세계가 대체 언제 출현하였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정치형(丁致亨)의 《영광정씨재신사보서》(170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홀연히 전라도 몇 곳에서 한 문적이 나타났는데 대양군 이하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관함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로써 본다면 문제의 ‘대양군 이하의 세계’는 현재 전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1701년 이전에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상한은 어디까지일까? 역대 가승을 모아 1660년에 정시걸(丁時傑)이 편찬한 《압해정씨술선록》의 정씨묘지 조는 압해ㆍ덕수ㆍ백천 강서ㆍ백천 율학ㆍ행주 토당 무원ㆍ광주 낙생ㆍ충주 단월 등 선영 소재지 7개처를 소개하고 있다. 중복되지만 그 가운데 ‘일왈(一曰) 압해(押海)’를 보자.

 

압해는 본적의 땅인데 시조 이하 6대의 분묘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압해 경내에 예닐곱 언덕에 묘소가 있고 현지 사람들이 정정승의 조지라고 하는데 우리 집의 선세에는 일찍이 정승을 지낸 분이 없었고 타적의 정씨 가운데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 공안공 찬성공 두 분께서 대를 이어 이상이셨으니 향인들이 이 때문에 정승이라 여긴 것은 아닌가? 세대가 오래 되었으므로 상세히 알 수 없다.

 

정시걸은 ‘압해는 본적의 땅인데 시조 이하 6대의 분묘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바, 《압해정씨술선록》이 출간되던 1660년 당시에는 비조 이하 6대의 사행 묘소가 모두 실전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압해도 현지의 ‘정정승의 조지’ 설만을 거론하고 ‘우리 집의 선세에는 일찍이 정승을 지낸 분이 없었고 타적의 정씨 가운데도 없었다’며 이도 수용하지 않고 있는 데서, 당시에는 ‘정정승조지’설 즉 ‘정모 정승의 조상 묘지설’만 있었지, 그 무덤의 피장자가 정정승이라거나 나아가 피장자 정정승이 이른바 ‘당나라 대양군 승상 정덕성’이라는 설과 ‘상계 세계’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산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이 정시걸의 글이 나온 지 32년 후인 숙종 18년 1692년에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 되어 호남에 파견되었을 때, 호남 여러 군현에 사는 정씨들의 배행하에 압해도의 이른바 정승묘를 성소(省掃)하고 돌아와 <압해도성묘기(押海島省墓記)>를 지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압해도는 고현이다. 지금은 나주에 속한다. 현의 북쪽 십리에 정시 시조 이하 오육대의 분묘가 있다. 산에는 세 등성이가 있는데 가운데 등성이의 큰 무덤을 현지 사람들이 서로 전해 오기를 정정승묘라 하고 그 골짜기를 정정승동이라 부른다. ---내가 임신년 가을에 재상경차관이 되어 호남에 갔을 때 사무를 끝낸 뒤, 11월 11일에 성묘했다.

 

이 글에서도 ‘당나라 대양군 승상 정덕성설’과 ‘상계 세계설’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 당시에 정덕성과 상계 세계가 출현하였더라면 현지를 답사한 정시윤이 전문하지 못했을 리 없고, 성묘 기록까지 남긴 그가 그 설을 전문하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따라서 정덕성설과 이하 십여 대의 세계는, 압해도성묘기가 쓰인 1692년 이듬해 1693년에서부터 영광정씨재신사보가 출간된 1701년 직전 해 1700년, 이 7년 사이에, ‘그 최초 날조자가 누구인지? 어디서 만든 것인지?’는 그때나 현재나 알 수 없으나, 그야말로 ‘홀연히’ 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1701년 이후에는 그 허구의 사실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정덕성설을 주장하여 앞에서 살펴본 고려 신종ㆍ희종ㆍ고종 대의 인물 정언진(?-1215)의 <화보재태부공구서>가 정덕성설에 고원한 권위를 부여하려는 요지에서 정언진의 명의를 도용한 날조의 위작이며, 그 시기도 최소한 1693년 이후라고 확정할 수 있다. 정재원ㆍ정약용 부자는 18세기 초엽(1729년 이전) 진주 소재 석갑산의 일부 고총(古塚)을 압해정씨 조상 분묘로 위조한 낭혜(朗慧)의 이른바 ‘난진(亂眞)’이 있은 후에 나온 문서로 본 것도 이 때문이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김언종:121-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