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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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덕성설의 기본 양상과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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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해도 고분의 피장자가 정덕성이며 그 이력 여하를 주장한 글 중 가장 주목되는 글은 고려 신종ㆍ희종ㆍ고종 대의 인물 정언진(丁彦眞, ?-1215)이 찬자로 되어 있는 이른바 <화보재태부공구서(華補齋太傅公舊序)>이다 그 서두는 다음과 같다.

 

원래 정씨는 모두 일족이다. 시조 대양군의 휘는 덕성으로 당나라 원화 연간의 명현이다. 당 문종 개성 연간에 대승상이었고 무종 회창 연간에 대승상으로 대양군에 봉해져서---남양정씨가 되었다. 당 선종 대중 연간에 대승상이 되었다. 대중 7년 계유에 동국에 장류되어 처음으로 압해도에 들어갔으니 신라 문성왕 11년이다.

 

요컨대 당나라 문종ㆍ무종 연간에 대승상을 역임하고 신라 문성왕 때 신라 땅 압해도에 유배되었던 대양군 정덕성이라는 인물이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시조라는 것이며, 당나라에서의 구체 이력과 압해도 입도 연도까지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응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글 중의 하나인 <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은 한편의 짧은 글이지만 관련 쟁점과 고증이 잘 언급되어 있다. 그 전문을 인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나주 압해섬에 정승동이 있다. 그 위에 정정승의 묘가 있고 묘 앞에 ‘대상정공지묘(大相丁公之墓)’라 쓴 비가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공의 휘는 덕성, 당나라 선종 때 벼슬이 승상에 올랐다. 어떤 일로 신라의 섬에 귀양 가게 되어 압해섬에 정배되었다가 죽어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타향 땅에 묻혔다.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고구려ㆍ백제가 망할 당시의 상황을 고찰해 보니 처음에 이세적(李世勣)에게 한반도 서쪽 지역을 관할하게 하고 유인원(劉仁願)에게 한반도 남쪽 지역을 진무하게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모두 철수하였다. 오직 서쪽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재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안동도호부는 처음에 평양에 두었다가 뒤에 요동으로 옮겼고 또 요서로 옮기는 등 날로 축소되고 멀어져 갔다. 뒤에 당 현종 천보의 난이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버리고 돌보지 않게 되어 신라가 통일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게 되었다. 대저 대신을 귀양 보낼 때 반드시 영토 안의 어느 곳으로 보내는 것인데 무슨 죄로 주변국의 섬으로 보낸 단 말인가? 하물며 승상이란 한나라 때의 관직이며, 정승이나 대상은 우리나라 말이다. 당나라 때 승상ㆍ정승ㆍ대상이 있었던가? 이로 말한다면 정공이 당나라 사람이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혹 우리나라의 대신으로, 살았던 때가 당나라 선종 당시였던 것은 아닌지? 내가 송(宋)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에 사신 왔을 때 쓴 기록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나라 법에 무릇 중죄인은 흑산(黑山)의 바닷속으로 귀양보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혹시 신라 때부터 흑산 바다 가운데의 한 섬이다. 그러나 신라 때 정씨는 드러나지 않았고 반드시 고관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압해가 정씨의 대본(大本)이며 무덤 속의 대부는 정씨의 대조(大祖)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이 모두 없어졌으니 슬프다. 요즘 사람들이 옛 역사에 소략하여 의심 않고 믿으므로 나는 일찍이 생각했던 바를 적어 뒷날의 군자를 기다린다.

 

이 글 모두(冒頭)의 ‘고기(古記)’ 인용에서 보듯, 고기에서는 정덕성이 승상 직을 역임한 시기가 <화보재태부공구서(華補齋太傅公舊序)>의 당나라 문종(文宗)ㆍ무종(武宗) 연간과는 달리 선종(宣宗) 연간으로 되어 있다. 다산이 이 글에서 인용한 고기가 어떤 제목의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화보재태부공구서> 만큼이나 알려져 있으며 <화보재태부공구서>처럼 압해도 고분의 피장자가 정덕성이라고 주장하는 글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다산 당시에 정덕성 사적은 대동소이한 여러 이본에 조금씩 다르게 실려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덕성설을 주장하는 고기(古記)의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의 풀이에서 보듯, 정덕성설 등장 이전에 압해도 현지에서는 단지 그 고분의 피장자가 정씨 정승이었다는 전설이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그러한 전설과 정덕성설을 모두 불신하였다. 압해도에서 한 조상이 발신하여 가문이 세상에서 인정되고 가계가 이어지게 되었지만 그 비조 이하 6대의 사적ㆍ묘소를 모두 실전한 사실은 고려 말 이전 문헌 기록이 미비하였던 우리나라의 일반 사정에서 압해 정씨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종의 유감과 미련이 없을 수 없던 처지에, 대국(大國) 당(唐)나라에서 최고위 직을 역임한 정덕성과 관련 사적은 커다란 유혹이었을 것이다. 세계(世系) 정립을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세대가 성의껏 모색하였어도 찾을 수 없었고 게다가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화려한 인물과 사적이었지만, 당대 압해 정씨 문중은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인물과 사적이라 해도 허위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진실 여부 판명은 예나 지금이나 양식 있는 식자들이 응당 시도하여야 할 의리였다. 압해정씨 문중의 이러한 태도와 모색이 쟁점이 심화된 시기에 이르러 다산에 의해 문적으로 표명되었을 뿐인 것이다.

다산의 입장과 변파는 명쾌하다. 무징불신(無徵不信)이다. 전설의 정덕성설을 제외한 정승설과 피장자가 당나라 선종 때의 승상이며 죄를 지어 신라로 귀양 와서 압해도에서 죽어 묻힌 정덕성이라는 설은 믿을 수 없다. 다만 피장자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정씨의 원조이겠는데 누구인지는 증빙이 없어 알 수 없고 안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고기(古記)에서 정덕성이 ‘당나라 선종 때 ---어떤 일로 신라의 섬에 귀양 가게 되어 압해섬에 정배되었다가 죽어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타향 땅에 묻혔다.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고 주장하였지만, 당나라 선종 당시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확연히 구분된 영토 상황과 영토 내 유배지 선정 관행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다산이 굳이 7세기 신라 통일 전쟁과 대당 투쟁 당시 당군의 주둔 사정을 언급한 것은 그 때야말로 압해도를 포함 평양 이남 지역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영토 분쟁을 벌린 유일한 시기여서이다. 당군은 660년 백제 멸망과 더불어 유인원의 지휘하에 웅진에 주둔하여 664년에 백제 부흥군에 넘겨줄 때까지 백제 부흥군과 전투하면서 신라 침공을 노리며 점거하고 있었고, 668년 고구려 멸망과 더불어 평양에 설인귀 이세적의 관할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주둔하면서 신라마저 강점하려 하였으나 신라군은 669년 백제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671년에 이르러 당군의 개입을 물리치며 완전히 점령하였고, 675년부터 평양 주둔 안동도호부의 당군과 결전하여 677년 드디어 당군을 무순(撫順, 푸순)으로 몰아내었다. 안동도호부가 만주 무순(撫順)으로 쫓겨 간 이래 당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였으며 영토 분쟁은 없었다. 당(唐) 선종(宣宗)의 재위 기간은 서기 857년(大中 1년)에서 859년(大中 13년)으로, 847년은 신라 문성왕 9년이며, 859년은 헌안왕 3년이다. 다산의 고증대로 이 기간은 물론이고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즉 7세기 후반 신라의 통일전쟁 시기 이후 당나라와 신라의 영토는 확정되어 있었다.

둘째, ‘당나라 선종 때 벼슬이 승상에 올랐다.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고 주장하였지만, ‘하물며 승상이란 한나라 때의 관직이며 정승이나 대상은 우리나라 말이다. 당나라 때 승상ㆍ정승ㆍ대상이 있었던가?’에서 보듯, 당나라 전기에 걸쳐 승상직이 설직(設職)된 적도 없었고, 정승ㆍ대상이란 관직 이름은 우리나라 말에다 속칭이기에, 이 사적은 그 자체에서도 모순을 두 번이나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해도 고분 피장자 정덕성설에 대한 압해 정씨의 입장을 대변한 이 변파에서도 다산의 실학자다운 자세가 잘 확인된다.

오늘의 견지에서도 고기(古記) 등에서 주장되는 정덕성과 관련 사적은 날조의 산물이며 오류의 중첩이다. 다산의 고증대로 당나라에는 승상이나 대승상(大丞相)이란 관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대승상(大丞相)이란 관함은 있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무엇보다도 <화보재태부공구서(華補齋太傅公舊序)>의 주장처럼 당나라 문종ㆍ무종ㆍ선종의 3대를 걸쳐 대승상을 역임하였다면, 아니 고기처럼 선종 당대에만 역임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사서에 기록되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정덕성’은 《구당서(舊唐書)》ㆍ《신당서(新唐書)》를 비롯 중국 어느 사서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ㆍ《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우리나라의 어떤 사료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장류(杖流)되었다는 선종(宣宗) 대중 7년은 서기 853년으로 신라 문성왕 15년인데 <화보재태부공구서>는 문성왕 11년이라 오기하는 혐의 마져 추가된다. 그뿐 아니라 ‘대양군’ 봉호도 근거가 없다. 당나라의 봉작제도에는 봉군제도가 없었다. 봉의 대상으로는 왕ㆍ군왕ㆍ국공ㆍ현공ㆍ후ㆍ백ㆍ자ㆍ남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정언진이 지었다는 <화보재태부공구서(華補齋太傅公舊序)>는 신빙할 수 없는 부실 문적이며, 더불어 그 찬자가 정언진(?-1215)이라는 것도 조작이었다. 작성 연대를 정언진의 몰년 1215년에 준거하여 13세기 초라고 비정하는 사례는 어떠한 설득력도 없다고 하겠다. 다산이 정덕성의 존재와 관련 사적을 일부 지역의 무지한 사람들이 가계 현창 분식을 위해 감행한 날조 행위로 간파한 것은 무리가 없었다.

다산의 검증에서 남는 문제는 다산이 이 글에서 참조한 고기의 정덕성설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대상’이란 관직이다. 이 관직이 검토 대상이 된 것은 이 글 초두의 ‘묘 앞에 ’대상정공지묘‘라 쓴 비가 있다’라고 한 고기와는 다른 맥락의, 다산의 직접 진술 속의 인용에 나타난 사례가 단서가 되었다. 다산은 왜 그렇게 소개하였고 문제 삼았을까? 다산이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이미 문제의 묘소 묘비 전면에 ‘정승정공지묘(政丞丁公之墓)’라고 비명이 각자되어 있었다. 이 비명은 1783년에 해좌 정범조(1723-1801)가 정승정공묘비음기(政丞丁公墓碑陰記)를 지으면서 논란 끝에 붙은 것이다. 그리고, 선세 이래 문헌을 취합해 정시걸이 1660년에 편찬한 압해정씨술선록에서도 ‘정정승조지(丁政丞祖地)’라고 하였고, 다산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이 1692년에 쓴 압해도성묘기(押海島省墓記)에서도 ‘정정승묘(丁政丞墓)’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산은 그 이후에 쓴 이 글에서 ‘묘 앞에 정승정공지묘(’政丞丁公之墓)‘라 쓴 비가 있다’라고 하지 않고, ‘묘 앞에 ’대상정공지묘(大相丁公之墓)‘라 쓴 비가 있다’라고 하였을까? 더욱이 대상과 정승은 둘 다 우리나라 고유의 직명으로 또 속칭이지만 서로 다르다. 대상은 고려 초기 이래 지방 향직의 명칭이고, 정승은 중앙정부 관료 최고위직의 명칭이다. 우리는 다산이 이 예민한 문제를 다루면서, 또 고기에서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라고 그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또 이 글의 제목을 <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이라고 하였으면서도, 근거 없이 문제 삼았다고는 도저히 추정할 수 없다.

다산이 정승을 대상으로 착각하였다고도 할 수 없다. 다시 이 글 제목 <압해정승묘변>을 주목하고, ‘하물며 정승이란 한나라 때의 관직이며 정승이나 대상은 우리나라 말이다. 당나라 때 승상ㆍ정승ㆍ대상이 있었던가?’라는 고증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듯, 다산은 ‘정승’과 ‘대상’을 분명히 구분하여 매거하면서 각각 문제시하고 있기에, 정승을 대상으로 오기하였다고 할 수 없다.

<화보재태부공구서>와 다산이 참조한 《고기(古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들과 유사하게 정덕성설을 주장해 다산이 참조한 사보에서는 정덕성이 당나라 문종조에서 대상을 지냈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와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의 정씨 가운데 일종의 사보가 있는데 이르기를, “압해 정승묘의 정승의 휘는 덕성이며 당나라 문종조의 대상으로 압해에 귀양 와서 살았고 대양군에 봉해 졌으며 묘가 압해에 있다. ---”하고는 ---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정덕성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정덕성이 당나라에서 역임한 관직을 대상이라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상 용례에서 대상은 다른 문적의 승상에 그대로 부합되기에 정덕성설을 날조하였거나 지지하는 세력의 일원인 ‘사보’의 편찬자는 대상과 승상을 동일시하였거나 당나라의 벼슬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서 우리는 이 대상이 다산이 소개한 비명과 직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소개는 이러한 사정에 관련되어 말미암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류 오해를 떠나 사보의 편찬자가 대상이란 직명 자체까지 날조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발설에는 무언가 나름대로 무슨 단서가 있었을 것이다. 정덕성설이 출현하기 이전에 문제의 고분에 관련된 압해도 현지의 전설에서 피장자의 관직을 역시 위 사례와 같은 사정에서 정승이라고도 하고 혹은 대상이었다고도 한 데서 유래하지 않았나 한다. 대상은 어떤 벼슬인지 제대로 모를 경우 그 외연 의미 그대로 ‘큰 벼슬’로 새기기 쉬우며, 더욱이 전파 과정에서 그런 오해를 이끌 개연성이 더 커진다. 이러한 사정에서 정승과 같은 차원에서 거명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보의 용례도 그 한 사례이다. 사보와 고기는 다 같이 정덕성설 추종설로 골격을 공유하는 한 범주이기에, 사보의 승상을 겨냥하였거나 당나라 벼슬로 오인한 대상 용례(당나라 문종조의 대상으로)는 고기에서 정승과 승상을 동일시한 오류(당나라 선종 때 벼슬이 승상에 올랐다. ---이것이 정승묘가 있게 된 까닭이다)와 그 성격이 동일하다. 즉 이 맥락들에서 정승과 대상은 사실상 하나의 같은 기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에서 압해도 현지에서 ‘대상정공지묘’라고 제명한 비가 1783년 이전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하겠다. 즉 “묘 앞에 ‘대상정공지묘’라 쓴 비가 있다.”는 다산의 진술은 전래의 비명을 따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산의 그 소개가 정확히 어떤 사정에 관련된 것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근거 없는 제시가 아니며 착각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상과 같이 자세히 검토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상이야말로 피장자의 실제 직명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승상 정덕성설은 다산의 변파대로 수용할 수 없는 낭설이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당연히 우리나라의 인물일 것인데, 일단 우리나라 직명이자 속칭이었던 정승과 대상을 단서로 이번에는 정덕성설과 전혀 무관한 차원에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정승설은 완전히 부정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압해 경내에 예닐곱 언덕에 묘소가 있고 현지 사람들이 정정승의 조지라고 하는데 우리 집의 선세에는 일찍이 정승을 지낸 분이 없었고 타적의 정씨 가운데도 없었다. ---

 

1660년에 정시걸이 편찬한 압해정씨술선록의 정씨묘지조 ‘일왈압해’항의 기술이다. ‘현지 사람들이 정정승의 조지라고 하는데’를 주목하면 우리는 압해도 현지에서는 애초에 정승은 고분 피장자가 아니라, 피장자의 후손이 역임하였다는 직명으로 운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고분을 가리켜 ‘정모 정승의 조상 묘소’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도 1660년 이전에 어떤 정모도 정승을 지낸 적이 없다는 정시걸의 가력 고증대로 부정되며, 나아가 피장자 정승설은 조금도 여지없이 근원부터 부정된다.

다산과 정시걸의 고증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피장자의 대상(大相) 명칭은 고려 초기 이후로 오랫동안 지방 호족에게 주는 향직이었다. 이런 사실과 연관되고 있지는 않지만 압해정승묘변 말미에서 다산이 추정한 대로 그 고분의 피장자는 고려 때 압해도의 실력자로서 중앙정부로부터 대상 직을 제수 받았던 정씨였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장자와 대상은 이러한 사정에 사실로 부합되는 것이다. 참고로 고증에서 다산이 정승과 더불어 대상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부정의 혐의가 있는 것은 그 글의 취지가 대상 자체의 검증에 있지 않았을 뿐더러 사보에서와 같은 정덕성설에서, 정덕성이 역임하였다고 하지만 당나라에서 있지도 않았던 벼슬 ‘승상’에다 대상을 연루시키거나 우리 고유의 직명이자 속칭인 대상을 당나라의 벼슬로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다산의 그 소개가 잘못된 착오였다고 하더라도, 또 현지 전설에서 피장자와 관련하여 정승설만 있었고 대상설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또 개갈 이전에도 ‘정승정공지묘’라고 제명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예 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정시걸이 기록한 정정승조지설과 1660년 이전에 모든 정씨 조상 중에 정승을 지낸 인물이 없었다는 고증을 모두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정덕성설이 부정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민간의 전설 정정승설과 당나라 승상 정덕성설은 다산의 고증대로 관직 명칭에서 상호 모순되며, 게다가 그 무엇보다도 정덕성설은 그 자체 내에서도 모순을 빚는 파행이기 때문이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김언종:109-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