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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덕성설의 사적(史的) 오류 |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정덕성에 관한 족보상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1881년에 간행된 《압해나주정씨족보》에 실린 기사인데 이는 위에서 검토한 바 있는 1693년에서 1700년, 7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호남 지방의 이른바 ‘구세보(舊世譜)’(일명 ‘사보(私譜)’)에 실린 기록에 바탕한 것으로 보인다.
당 덕종(德宗) 정원 6년 경진(800) 10월 13일에 중국 남양(南陽) 대리천(大川里)에서 태어났다. 헌종 원화 갑오(814)에 갑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15세였다. 같은 해 4월에 태자궁설서(太子宮 說書)가 되었고 8월에 대박사(大博士)가 되었다. 문종조(文宗朝)에 대승상(大丞相)이 되었고 무종조(武宗朝)에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다. 선종조(宣宗朝)에 다시 대상(大相)이 되었다.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바른 말을 하다가 황제의 뜻을 거슬러 동국으로 유배되었다. 때는 신라 문성왕 11년(849)이었다. 그대로 압해로 들어갔다. 의종이 조서를 내려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계축년(893) 3월 1일에 졸하니 향년 94세였다. 묘는 옛 아차현 서쪽 우산치 골짜기 건좌에 있는데 지금도 정승동이라 칭한다. 상세한 것은 구세보에 보인다.
과거에 급제한 나이, 기타 관직, 생몰 연월일까지 등장하였지만, ‘상세한 것은 구세보에 보인다’고 하였으니, 구세보의 기사의 기술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기사는 축약하였으면서도 윤식을 첨가하였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영광(영성)ㆍ창원(후창원)정씨족보에는 이보다도 더 상세한 기사가 있는데 이 또한 구세보나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부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는 사량이다. 당 덕종 정원 16년 경진 10월 13일 진시에 중국 등주 남양의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당 헌종 원화 9년 갑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에 태자궁 설서가 되었고 평장사부시랑 진현관부학사 대학사를 역임하였다. 이소(李愬)와 동모(同謀)하여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고 회서의 반적을 평정하였다. 문종조에 대상을 지내고 무종조에도 대상을 지냈고 대양군에 책봉되어 7백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선종(宣宗) 대중(大中) 7년 계유(853)에 참소를 당해 동국으로 유배 가게 되어 가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전라도 나주 압해도에 도착했는데 때는 신라 문성왕 15년(853)이었고 당시의 나이는 54세였다. 신라 헌안왕이 세 번이나 서라벌로 들어오기를 청했지만 사양하기를 “제 나라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사람이 어찌 감히 귀조에 들어가겠습니까?‘라고 고사하며 가지 않았다. 당 소종 경복 2년 계축(893) 3월 26일에 94세로 돌아갔다. 묘는 압해 정승동 남향에 있고 묘갈이 있다. 배위 군부인 반양고씨는 지제고 고응인의 딸로 묘는 정승동에 있다. 후손이 번성하여 각가 수봉지를 관향으로 하여 영광(영성)ㆍ후창원ㆍ금성ㆍ창원ㆍ의성 등 다섯 관향이 있는데 근원을 소구하면 모두 압해에서 나왔다. 사정은 행장에 실려 있다. 고사에 의하면, 공이 태자궁 설서로 있을 때 공의 생신이 되자 왕이 연회를 베풀어 주고 한림학사 왕영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내인을 시켜 비단에 시를 수놓게 한 다음 은총으로 하사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수성의 광채가 남쪽하늘에 빛나더니, 그대 집의 대모연을 밝게 비추네. 학을 타고 멀리서 온 이는 구름 밖의 손이요, 무지개 깃발은 선동의 신선을 모셔왔네. 춘풍은 요지의 복숭아를 익게 했고 향설은 옥정의 연꽃을 피웠도다. 오색의 찬란한 비단에 시를 수놓아 고당의 벽에 걸고 장수를 비노라.“라고 하였다. 전천옹이 또 비단에 새긴 시를 주었는데 ”한 점의 상서로운 빛이 상대를 밝히노니, 그대 집에서 오늘 헌수 잔치 열렸구나. 오래 늙지 않고 강녕한 복은 모두 단청의 묘함에서 오리라.“ 하였다.
이 기록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소상하게 정비된 정덕성의 사적이다. 부연과 보충을 제외하고 위 압해나주정씨족보의 기사와 이 영광(영성)ㆍ창원(후창원)정씨족보의 기사에는 몇 가지 상이가 있기도 하다. 후자에서 정덕성이 귀양 온 해가 신라 문성왕 11년에서 15년으로 수정되었고, 몰년의 월일이 3월 1일에서 3월 26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검토는 부질없다고 하겠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당나라 대승상 대양군 정덕성이란 존재는 중국ㆍ한국의 사서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원안이 허구이기에 그 파출의 성분 검토는 부질없다. 하지만 이런 근원 파탄을 차치하고, 두 글 사적 자체에만 두드러져 있는 모순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정덕성이 800년 정원 16년에 태어나 814년 원화 9년,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는 사적은 납득하기 어렵다.
②정덕성이 과거에 급제한 해에 태자궁 설서(說書)가 되었다는 사적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나라 때는 아직 이 관직이 없었다. 설서는 천자에게 경서를 강설하는 일을 맡은 관리로 송대에 처음 설치된 관직이었다.
③정덕성이 이소(李愬)와 동모하여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았다는 사적도 허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소를 도와 오원제를 사로잡은 사람은 이우(李祐)였다. 《신당서(新唐書)》 권214와 《구당서(舊唐書)》의 권145에 실려있는 오원제전이나 이소 기사 어디에서도 ‘정덕성’이란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당등절도사(唐鄧節度使) 이소(李愬)는 중당의 명장 이성의 아들로 오원제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소가 대공을 세운 데는 사로잡은 오원제의 장수들을 회유하여 이용한 것이 주효하였다. 원화 12년(817년)에 이소는 오원제의 장수(將帥) 정사량(丁士良)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고 대접하여 그로부터 적장 오수림(吳秀琳)을 항복시킬 계책을 얻어낸다. 계책이 성공하여 오수림의 항복을 받았고 다시 오수림의 말을 듣고 이우를 잡아 극진히 대우하여 오원제 체포의 결정적 역량을 확보한다. 《구당서》 권133 열전83의 이성전(李晟傳)에 실려 있는 이소(李愬)조의 기록을 보자.
일찍이 적장 정사량(丁士良)을 사로잡아 불러들여 대화를 해 보았더니 말투에 군색함이 없었다. 이소는 특이하게 여겨 그의 포박을 풀어주고 장수를 잡을 미끼로 삼았다. 사량은 이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적장 오수림이 수천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쉽게 격파할 수 없는 것은 진광흡(陳光洽)의 계책을 쓰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광흡을 사로잡아 오수림을 항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소는 그 말을 따라 과연 진광흡을 사로 잡았다. 12월에 오수림이 문성책(文成柵)의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오수림이 항복할 때 이소는 단기(單騎)로 책(柵)의 아래에 가서 오수림과 이야기를 나누고 항복 후에는 친히 그 포박을 풀어주고 아장(衙將)으로 삼았다. 수림은 감복하여 은혜를 갚기를 기약하고 이소에게 말하기를 “만약 적(오원제)를 격파하려면 이우(李祐)를 얻어야 합니다.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우는 적의 기장으로 담략이 있었다. ---(이우를 사로잡은 뒤에)관군들이 늘 이우에게 괴로움을 당해 왔기 때문에 모두 이우를 죽이기를 청했다. 이소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포박을 풀어주고 예우해 주었다. 이소는 틈만 나면 이우와 이충의를 불러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때로 밤이 이슥할 때까지 하였다.---
다시 말해 정덕성이 이소(李愬)와 동모하여 오원제(吳元濟)를 잡아 회서(淮西)의 반적을 평정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이소와 동모하여 오원제를 사로잡고 회서의 반적을 평정한 사람은 이우였던 것이다.
또 정덕성의 생년이 서기 800년이라 하는데, 오원제가 잡혀 죽은 해가 817년이다. 그렇다면 17세의 소년이 당시의 당나라 국기를 뒤흔들던 오원제의 반란을 평정한 대공을 세운 것이 되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오원제의 반란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던가는 난이 평정된 후 황제가 당대 최고의 문장가 한유(韓愈)에게 명해 평회서비 일문을 지어 돌에 새겨 세우게 했던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덕성의 자(字)를 ‘사량(士良)’이라 하였는데 당나라의 반적(叛敵) 오원제(吳元濟)의 부하 가운데 ‘정사량(丁士良)’이란 자가 있었고 이소(李愬)에게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④문과에 급제한 뒤 태자궁 설서를 거쳐 ‘진현관 부학사’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도 성립되지 않는다. 당나라 관제에는 진현관이 없었다. 진현관은 고려 충렬왕 29년 1303년에 처음 설치된, 고려의 학문 연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다.
⑤정덕성이 당나라 문종ㆍ무종 조에 ‘대상’벼슬을 지냈다고 하였는데 다산이 압해정승묘변에서 변파한 바 있다시피 중국에는 그런 관직이 없었다. 대상은 우리나라의 관명이다.
⑥정덕성이 태자궁 설서직에 있을 때 생신이 되자 왕이 연회를 베풀어주고 한림학사 왕영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는 사적도 문제 있다. ‘왕’이란 호칭이 그것인데, 이 당시의 황제 헌종을 ‘왕’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태자를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⑦당 헌종 원화 연간에 한림학사였다는 왕영(王英)도 사서에 흔적이 없다. 동명이인이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에 각각 한 명씩 있어 사서에 등장할 뿐이다.
⑧위 사실을 떠나 왕영이 전천옹과 정덕성의 축수시를 지었다는 사적도 납득될 수 없다. 겨우 15세의 소년의 생일에 축수시를 짓는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날 뿐이다.
이상으로 정덕성 기사의 사적이 가진 자체 내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짧은 그 한편에 이토록 사실과 상식에 배치되고 위반되는 사항들이 많은 경우도 극히 드물다 할 것이다. 시조라 주장하는 정덕성에 관한 기록이 이 모양이니 더불어 나타난 그 이하의 이른바 상계 세계는 같은 성격의 허구가 개재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주정씨 선계연구,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동문선, 2009. 1. 30재판. 김언종:128-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