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도시조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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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도시조설의 대두 이유와 위작 자료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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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實地)》 소재 전국 성관(姓貫) 가운데 정씨(丁氏)의  본관은 20여개가 넘었고, 조선 말기에 증보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씨족고(氏族攷)에는 40여개가 넘는 정씨의 본관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던 정씨의 본관이 현재는 4-5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많던 정씨의 본관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본(本) 및 조상 세계에 관한 위작 자료가 나오게 된 배경은 정씨의 경우는 《월헌첩》계의 압해(나주)정씨가 16세기 이래 명문ㆍ벌족으로 성장한 데 반해 영광ㆍ창원ㆍ의성 정씨계 등 기타 정씨들은 족세ㆍ가격상으로 좀 뒤지고 있었다. 이에 어떤 호사가에 의하여 압해(나주)ㆍ영광ㆍ창원ㆍ의성 등을 본관으로 한 제파계를 합보하여 중국으로부터 온 고관자를 도시조(都始祖)로 내세우고 분파되기 전의 상대 조상의 관직을 고관대작으로 날조하여 계보화한 데서 위보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월헌첩(月軒帖)》 소재 상계 조선의 명단과 정황 등이 명종 6년(1551)에 편찬한 《창원정씨족보(昌原丁氏族譜)》에 기재된 선대 조상의 명단, 영광ㆍ의성정씨의 선대 조상 명단과 《고려사(高麗使)》에 기재된 정열ㆍ정언진ㆍ정공수ㆍ정찬 등을 시대순으로 적당히 배열, 계보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위보에 기재된 내용을 뒷받침하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위조 자료가 조작되었다고 본다.

 

<정열행장> (영남대도서관 소장 압해정씨(초암공파)술선록 사본 말미에 기재)

<대장정공윤종묘음기> (동상)

<진주석갑산고총병풍석소각문자> (동상 압해정씨술선록 사본 말미에 기재)

<화보재태부공구서> (개희오년기사(1209년)는 가정 2년이 맞음, 丁彦眞 撰)

 

상기 자료를 열람해 볼 때 고려 시대와 한국 성관사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라면 한번 보고도 그것이 위작 내지 날조되었다고 단정할 것이다. 상기 자료는 정사인 《고려사》와 대조할 때 내외조상의 세계와 그들의 관직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으며 관련 내용이 전혀 사실과 맞지 않다.

영남대도서관 소장 《압해정씨술선록》 사본 말미에 기재된 ‘정열행장(丁悅行狀)’ 등은 다산 정약용과 정석구(창원정씨세보 소재 소지: 왕재모년간, 유소위랑혜선정남신자, 출주작위보, 두찬지장, 후무제정, 미란세차, 심지어 압해석갑산지묘소이극의)의 지적한 바와 같이 선승 낭혜(丁南愼: 창원정씨계)의 소작(所作) 문자로서 사전에 압해정씨술선록과 정황 등이 정리해 놓은 창원정씨 상대세계 및 고려시대 정성(丁姓) 인물(人物)이 기재된 고려사를 보고 압해 정씨 시조인 정윤종 이하 세계와 창원정씨 세계 및 고려사에 나타나는 정열(별장ㆍ친종랑장)과 고려 후기 고관을 역임한 정성 인물(정언진ㆍ정공수)을 적당하게 시대순으로 배열하여 계보화하되 정윤종 이상 세대는 완전히 날조하여 위보를 만들고 그 위보를 증빙하기 위하여 정열행장 등을 날조하고 또 위보와 조작된 장갈문자(狀碣文字)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진주(晋州) 석갑산(石岬山) 소재 고총(古塚) 6기(六基)의 병풍석에 날조된 문구를 각입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러한 조작자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과 작업 순서에 대해서는 자료의 결여로 이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정열행장’은 《고려사(高麗史)》 권94, 채지문ㆍ하공진ㆍ강민첨열전 등에 나오는 사실과 정열을 결부시켜 조작한 것인데 내용이 해괴하여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사료된다.

현재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압해정씨술선록(草庵公派述先錄)>에 정윤종 비음기(丁允宗碑陰記) 전문이 소록되어 있다. 그 전문을 보자.

 

 

大將軍丁公允宗墓陰記

 

有明高麗國吏部尙書叅知政事門下侍中平章事檢校大將軍丁公神道碑陰

同知樞密院使叅知政事門下侍中平章中書令慶州崔世輔撰書

公字錦天, 元祐八年癸酉六月十八日, 生于義昌縣, 本羅州. 考都承旨贈門下侍中諱瓊, 祖大相中書令諱㭓, 曾祖都元帥駙馬書門下侍中大相諱悅, 高祖贈紫金魚袋大相諱聖徽. 公少學登第, 睿宗在潛邸, 聞其名, 奏爲典籤, 及卽位, 累拜中樞使, 加爵, 未幾御使大夫, 歷戶兵吏部尙書, 左僕射叅知政事. 仁宗初, 進開府儀同三司上柱國, 尋判尙書刑部事, 後以中書侍郞平章事, 權判東北面兵馬兼行宮兵馬事上諫議大夫加守大尉門下侍中同中書門下平章事同三司檢校大傅大將軍上柱國佐理同德功臣, 食邑七百戶, 乾道六年庚寅三月十八日卒. 諡忠烈. 公母權氏大相敬中之女, 生三男. 長曰奕材 侍中, 次曰奕光 中郞, 次曰奕機 侍中. 長孫彦卓 散員郞.

 

이 비문에 의거하면, 정윤종(丁允宗)은  정경(丁瓊)의 아들로 1093년에 경상도 의창현(義昌縣)에서 나서 1173년에 향년 81세로 죽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며 예종(1105-1122년 재위)이 왕자로 있을 때 추천하여 전첨(典籤)이 되었고, 예종 때 중추사어사대부호부상서병부상서리부상서좌복야참지정사(中樞使御使大夫戶兵吏部尙書左僕射叅知政事)를 역임하였으며, 인종 때는 진개부의동삼사상주국(進開府儀同三司上柱國)ㆍ형부상서ㆍ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ㆍ권판동북명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事) 행궁병마사(行宮兵馬事) 상간의대부대위 대장군(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등의 현관을 역임하였다는 것이다. 명문에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적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①이 비음문은 제목과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사람(撰書者)’를 밝힌 “유명고려국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중 평장사 검교대장군 정공 신도비음 동지추밀원사 참지정사 문하시중 평장 중서령 경주 최세보찬서(有明高麗國吏部尙書叅知政事門下侍中平章事檢校大將軍丁公神道碑陰 同知樞密院使叅知政事門下侍中平章中書令慶州崔世輔撰書)”의 앞머리를 장식하는 “유명고려국(有明高麗國)”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유명(有明)’의 ‘명(明)’은 명(明)나라(1368-1622)를 가리키며 ‘유(有)’는 접두사로 명사 형용사 동사 앞에서 음절의 절주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쓰이는 허사이다. 그런데 비음문을 찬서한 최세보(崔世輔)는 1193년(고려 명종 23년)에 서거(생년은 미상)한 고려 중기의 인물이다. 즉 그가 죽은 뒤 180년 후에야 명나라가 개국하였기에 “유명고려국(有明高麗國)”이란 표현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②정윤종이 의창현(義昌縣)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도 사실일 수 없다. 의창현은 1282년(충렬왕 8년)에, 신라 경덕왕 때부터 설치하여 불려왔던 의안군(義安郡)을 고쳐 부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1193년에 죽은 최세보가 어떻게 89년 후인 1282년에 재정된 의안군의 새 이름 의창현을 알고 거명할 수 있겠는가?

③정윤종의 아버지 정경(丁瓊)의 벼슬을 ‘도승지(都承旨)’라 하였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도승지 직의 치폐는 여러 번 반복되지만 최초의 설직 연대는 1298년(충렬왕 24년)이었다. 충렬왕은 이전의 ‘밀직사’를 ‘광정원’으로 ‘지주사’를 ‘도승지’로 고치고 품계를 종5품으로 하였다. 1193년에 죽은 최세보가 어떻게 105년 후인 1298년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묘석의 기록처럼 정윤종의 생몰 연대가 1093년-1173년이라면 그 아버지 정경의 생몰 연대는 한 세대 빠른 1063-1143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1143년에 죽은 정경이 어떻게 155년 후인 1298년에 처음 설치된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겠는가?

④증조라고 주장되는 정열(丁悅)의 관함을 ‘도원수부마서문하시중대상(都元帥駙馬書門下侍中大相)’이라 하였는데, 정열은 《고려사(高麗使)》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거란의 성종이 고려를 친정하였을 때 활약한 바 있다. 《고려사(高麗使)》 열전(列傳) 채지문전(蔡智文傳)에 보이는 관련 구절을 보자. 정열의 관함은 별장(別將), 친종랑장(親從郞長)이었다.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군 전봉원수(前鋒元帥) 부마(駙馬)의 서신(書信)과 하공진(河拱辰)의 주장을 가지고 왔다. ---왕은 하공진의 주장을 보고 적병이 이미 물러난 것을 알고 기뻐하며 송균언을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로, 정열을 친종랑장(親從郞長)으로 삼았다.---

 

이 구절의 정열이 정윤종의 증조로 주장되는 정열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윤종의 증조로 주장되는 정열은 이 구절의 정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공교롭게도 비문에서 주장되는 정열의 관함 ‘도원수부마서문하시중대상(都元帥駙馬書門下侍中大相)’은 한심하게도 이 구절 정열 사적에 관련된 사항을 짜깁기한 가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인용 중 ‘거란군 전봉원수 부마’는 소배압(蘇排狎)의 관함인데, 비문이 주장하는 정열의 그 관함 중 ‘도원수’는 바로 그 소배압의 ‘전봉원수’ 직함을 변조한 것이고, ‘부마’도 소배압의 신분이 거란 성종의 ‘부마’였음을 도용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 ‘書’자가 첨가된 ‘도원수부마서’는 ‘거란군의 도원수이자 부마인 소배압의 편지’라는 뜻이기에 더욱 황당하다. ‘부마서’는 관함이 아닌 것이다. 이런 천박한 표절 변조가 어떻게 비문에서 정열의 관직이 되었을까? 위조자의 천박한 문리가 그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또 ‘문하시중’ 또한 터무니없다. 별장(別將)에서 공을 세워 친종랑장(親從郞將)에 특임되었을 뿐인 무반(武班)인 정열이 문관직으로 위극인신(位極人臣)의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리가 분명하며 《고려사(高麗史)》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구체 관함이 나열된 상태에서 대상(大相)은 그저 혐의만 부풀리는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정윤종의 증조로 주장되는 정열은 고려사의 실존 인물 정열을 표절한 가상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정열의 묘로 주장되는 묘와 묘역 전체의 변조 상황을, 그리고 정열이 포함된 상계 15대설의 실상을 대강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오류 검토만으로도 정윤종의 묘라고 주장되는 묘의 비문이 저질 위조 비문이라는 점을 증명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터무니없는 글을 실은 이른바 <초암공파술선록>에 회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김언종:152-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