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설의 허구
도시조설의 허구

본문

8. 결론

back.jpg

 

월헌첩(月軒帖)ㆍ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ㆍ순천보(順天譜)를 이어서 편찬된 역대 우리 족보에서 단 한번도 소위 대양군 정덕성(大陽君 丁德盛)을 기재하거나 시인한 적이 없다. 특히 당대의 대학자였던 해좌공(海左公, 휘 範祖)이나 다산공(茶山公, 휘 若鏞)은 대양군에 관한 전설을 극구 부인 변증하는 글을 여러 차례 쓰신 일이 있다.

 

관운공(諱 時傑,1606-1670)의 《압해정씨술선록(押海丁氏述先錄)》ㆍ<속적변(屬籍辨)>ㆍ<압해묘지변(押海墓地辨)>, 그리고 두호공(諱 時潤,1646-1713)이 재상경차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 압해도로 들어가 말로만 들어왔던 우리 대조(大祖)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하시고 돌아와서 쓰신 <압해도성묘기(押海島省墓記)>를 보아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그 뿐만 아니라 해좌공(諱 範祖, 1723-1801)의 <정승정공묘비음기(政丞丁公墓碑陰記)>ㆍ<답종인서(答宗人書)>나 다산공(諱 若鏞)의 <정승묘변(政丞墓辨)> 등의 문장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관운공은 그의 《술선록》에서 우리 나주정씨의 시조와 선계에 대해서, 앞서 월헌공(휘 壽崗, 1454-1527)께서 작성해 두셨던 《월헌첩》을 근거로 시조의 본적지와 활동무대 그리고 졸 후의 분묘를 압해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연대나 위치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조상에 관한 일이므로 확실한 증거 없이 경솔히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호공도 역시 똑 같은 이유로 묘 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실 그대로 ‘정승정공지묘(政丞丁公之墓)’라고만 알아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질 나쁜 호사자의 작란거리가 되어서, 조상이 다른 정씨들 간에 서로 조상문제를 가지고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분쟁의 불씨가 될 줄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역시 조상에 관한 한,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 두는 것이 후손들의 올바른 도리요, 역사를 뒤집어 결국은 환부역조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망동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억측으로 임하거나 거짓 자료를 근거 삼아 역사적 중요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더욱 더 옳지 않은 행동이다.

시조라고 하는 것은 그 후손들이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할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월헌첩》의 기록에 의하면 대장군 할아버지는 그 당시 고려시대의 검교대장군이란 명예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혁재(奕材)라고 하는 아드님 한 분을 두셨다.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일찍이 월헌공께서 간략하지만 그 가첩을 만들어 놓지 않으셨던들 이마져도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장군 시조의 분묘에 대해서는 압해도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나 압해도 어디에 있는 어느 묘인지는 줄곧 확실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관운공은 《술선록》에서 그 당시까지 정씨의 세장지(世葬地)를 일곱 군데로 나누어 기록하셨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압해(押海)였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압해는 우리의 본적지이면서도 시조 이래 6세조(世祖)까지의 분묘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압해도의 경내에 6-7기의 묘가 있는데, 토착인들 사이에는 정 정승 조상의 묘지라고 전해 온다. 그런데 우리 집 선세에는 일찍이 정승이 된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정씨에도 역시 없었다. 다만 우리 선조 중 공안공(恭安公)과 충정공(忠靖公)이 양 대에 걸쳐 이상(貳相)을 지내셨는데, 이곳 향인들이 그것을 정승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닐까? 세대가 이미 멀어져서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라고 하셨다. 또 두호공께서도 1692(숙종18)년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호남일대에 출차(出差)하셨던 기회에 압해도에 들어가 성묘하고, <압해도성묘기(押海島省墓記)>를 쓰셨는데 거기에도:

“압해도는 옛 현(縣)으로 지금은 나주에 속한다. 현의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정씨의 시조 이하 5-6대의 분묘가 있다. 분산은 삼강(三岡)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큰 무덤을 토박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 정승(丁政丞)의 묘라고 전해왔고, 그 동리 이름을 정승동(政丞洞)이라고 불렀다.”

라고 하셨다. 또 해좌공께서도 <정승정공묘비음기(政丞丁公墓碑陰記)>를 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주의 옛 압해현에 산이 있어서 바다로 뻗어 들어가 섬이 되었다. 그 섬에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는 무덤이 있다. 고을 사람들은 이것을 정정승의 묘라고 전해오고 있고, 그 근방에 살고 있는 여러 정씨는 모두 그 자손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들의 세보(世譜)에는 덕성(德盛)이라고 하는 사람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덕성은 당나라 문종 때 벼슬이 승상에 이르렀고, 대양군에 봉해졌으며, 선종 때에 언사(言事)에 연루, 신라로 유배되어 압해도로 와서 살다가 생을 마쳤는데, 그가 바로 정승공이며, 자손이 대대로 현달하여 고려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나 당사(唐史)나 국사(國史)에는 어디에도 증거가 없고, 그들의 세보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 신실(信實)한 고사(古事)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또 <답종인서(答宗人書)>에서도

“조상은 자손에게 기맥(氣脈)을 물려주고, 윤서(倫序)를 계승시키는 것으로, 마치 물에는 원류(源流)가 있고, 나무에는 간지(榦枝)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예로부터 사대부가 족계(族系)에 대해서는 대단히 근엄하여 감히 이를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우리 정씨들은 관향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그 성씨를 얻은 곳은 대저 모두 압해를 본거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에서 정씨는 한 본이라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정승공의 묘가 기왕에 압해에 있고, 그 고을 사람들이 정 정승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이론이 없음으로 우리 정씨들이 그런 까닭으로 산소를 지키고, 꾸미고, 참배함으로써 그 숭봉의 뜻을 다했던 것인데, 그것이 어찌 유독 귀향(貴鄕)의 제종들만 그랬겠습니까? 모든 정씨들이 다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묘의 주인공이 휘는 모(某), 몇 대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거도 없이 말한다는 것은 근엄한 뜻이 아닌 것입니다.”

라고 하여 대양군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만약에 대양군을 믿는 종원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손들의 일이지 우리 정씨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아주 극단적이며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 후에 다산공(휘 若鏞, 1762-1836)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토박이 사람들 사이에 5-6 대 선조의 분묘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두호)공께서 성묘한 것은 정승묘이고, 봉수산(烽燧山) 1구(區)와 면전산(綿田山) 삼혈(三穴)을 이것저것 조사했었다. 그 이른바 정승묘는 우리 시조의 무덤이 명백하고, 남부 여러 정씨의 가보 첩에 이름과 관직을 세세로 승계시키고 있는 것은 근거할만한 문헌이 없는 이상, 오종(吾宗)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다.”

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여러 믿을 수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선조들은 하나같이 대양군을 강하게 부정하였으며, 그곳 6-7기의 분묘는 분명 우리 시조(휘 윤종) 이하 여러 대 조상님들의 분묘로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본적지는 곧 시조께서 사셨던 고장이고, 대장군 시조께서는 적어도 그 당시 압해에서는 호족(豪族)이었으며, 제2세 휘 혁재(奕材)는 중랑장동정(中郞長同正), 제3세 휘 양(良) 제4세 휘 신(信) 제5세 휘 준(俊)은 모두 별장동정(別將同正), 제6세 휘 공일(公逸)은 산원동정(散員同正) 등의 지위에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두 같은 마을의 박씨(朴氏) 주씨(朱氏) 등과 혼인하여 사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곳에 묻히셨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타성 정씨의 최초로 발간된 족보에도 소위 대양군 정덕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모든 정씨의 족보 가운데서 가장 일찍 발간된 《창원정씨족보》는 1551년(명종6) 유헌(遊軒) 정황(丁熿) 선생의 소찬인데, 거기에는 시조를 신라군장 정광현(丁光顯 혹은 丁光純)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1599년(선조32)에 간행된 《영광정씨족보》는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선생의 소찬이다. 이 족보도 그 연대가 우리의 관운공께서 쓰신 《술선록》의 1660년보다도 61년이나 앞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도 시조는 고려시대의 정진(丁晉)으로 되어 있고, 그 자신이 시조로부터 10대손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 뿐, 대양군 정덕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상과 같은 두 족보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창원ㆍ영광 두 정씨의 신실한 최초의 족보임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0년 초에 난데없이 자신들의 족보는 믿지 않고 갑자기 어떤 호사자가 나타나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사보(私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압해ㆍ영광ㆍ창원 등 그 당시 한반도에 살고 있던 모든 정씨들의 시조 위에 당나라에서 귀양살이 왔다는 소위 대양군 정덕성(丁德盛)이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도시조로 삼고, 무려 수백 년의 1인 1대 세대를 꿰어 맞추어 놓았다. 없는 인물을 가공 미화해서 최고의 관작과 영예와 상훈을 과분하게 분장시키다 보니 진실은 간데없고 허구허식만 증폭되어 그 누가 보던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적 왜곡물이요 소설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의 족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상이란 자손에게 피를 나누어 주신 뜻있고 거룩하신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조상을 운위(云謂)할 때는 추호(秋毫)의 거짓이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어찌 우리가 1천여 년 전의 실존 여부도 의심스러운 외국인을 경솔하게 시조로 정해 놓고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가승(家乘)에도 없는 세계(世系)를 멋대로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까마득한 옛날 일는 접어 두고, 그저 고대(古代)로 올라가면 모두가 다 가까운 일가친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상(推想)을 하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는 간섭도 강요도 하지 말고, 서로 서로 친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