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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산가의 현지답사와 견해 |
충격이 적지 않았을 정항신(丁恒愼)은 전문(傳聞)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4년 후 1733년에 사망하였다. 그를 이어 아들 정지해(丁志諧)는 전문한 지 19년 후인 1748년에 진주 석갑산(石岬山)을 직접 답사하였고, 자세한 기록을 남긴다. 정지해의 당시 나이는 37세였다.
정지해의 답사기는 아들 정재원(丁載遠)의 <진주석갑산정씨분산변(晉州石岬山丁氏墳山辨)>에 실려 있다. 복잡한 문제의 이해를 위하여 전문을 세밀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크게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정재원이 부조(父祖)로부터의 전문을 기술한 부분이며, 그 다음은 정지해의 답사기, 그 다음은 정재원의 논증이다. 먼저 정재원의 전문을 살펴보자.
옹정(雍正) 기유(己酉) 연간(1729)에 중 낭혜(朗慧)란 자가 정씨(丁氏)라 칭하며 우리 집과 내왕하였다. 그가 감여(堪輿)의 술(術)을 스스로 자랑하길래 우대해 주었더니 “진주 석갑산에 (바로 평거역 뒷산 기슭이다.) 정씨의 여러 대 분묘가 있다.” 하고는 사대석(莎臺石)에 새겨져 있는 글자와 표석(標石)의 문자를 베껴 온 바 있었고 오랫동안 반신반의의 상태로 두었다. 무진년(1748) 봄에 선친께서 홀로 천리 길을 가서 그 진상을 알아보셨는데, 과연 세 줄기 산기슭에 여섯 기의 돌을 두른 무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새겨진 기록을 살피고 전해 오는 이야기를 참고해 보니 그 곳이 정씨의 분산(墳山)임은 비록 분명한 듯하나 위조된 흔적과 의심스러운 사안의 단서가 한둘이 아니었다.
낭혜는 정항신(丁恒愼)을 포함 압해정씨 가문이 9대 옥당(玉堂)의 빛나는 전통을 가진 명문이며 명확한 보기(譜記)가 있어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던 이른바 ‘압해도 고분 피장자 정덕성설 및 정덕성을 시조로 하는 범정씨동근동조설(汎丁氏同根同祖說)’을 수용하지 않는 가문임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하는 정지해(丁志諧)의 답사기이다.
그 이른바 대장군묘(大將軍墓)라는 것은 표석 전면에 ‘대장정공윤종지묘(大將丁公允宗之墓)’라는 8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작은 글자 11줄의 흔적이 나란히 역력하고 자형 역시 고찰할 것이 많으며 깎고 갈아 고쳐 새긴 흔적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가 없었다. 비음기(碑陰記, 그 글이 길어 싣지 않는다.)는 생졸(生卒)ㆍ이력(履歷)ㆍ대계(代系)ㆍ자성(子姓)을 기록하였는데 자형이 옹종(擁腫)하고도 부정(不正)하며 상하 대소의 엉성하고 빽빽함이 균형이 맞지 않은데다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글자에 완결(刓缺)됨이 없다.
그 이른바 시중묘(侍中墓)라는 것의 대석(臺石)에 ‘소정원년기축삼월칠일시중정공량지묘부령동정혁재합묘재상(紹定元年己丑三月七日侍中丁公良之墓祔令同正奕材合墓在上)’ 27자가 씌어 있는데 돌에 새겨진 획이 가늘고 얕은데다 글자의 줄이 들쭉날쭉하여 근래에 새긴 흔적이 현저하였다. 돌의 재질은 푸르고 숫돌 같은데 작은 칼로 새겨 보았더니 새기기가 부드러웠다.
그 이른바 정열(丁悅)의 묘라는 것은 대석에 ‘원풍이년십월일일대상정열지묘(元豊二年十月一日大相丁悅之墓)’라는 14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상정열(大相丁悅)’ 네 글자는 잘 썼고 잘 새겼으나 ‘풍(豊)’ㆍ‘년(年)’ㆍ‘십(十)’ㆍ‘일(一)’ㆍ‘묘(墓) 다섯 글자는 자획이 비스듬하여 바르지 않고 높낮이도 고르지 않은 걸로 보아 한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었다. 대체로 큰 획을 깊이 팠는데, 갑자기 판 것이라거나 가까운 옛날의 필적은 아닌 듯 하였다.
그 이른바 정변묘(丁㭓墓)라는 것은 대석에 ‘00원년정해십이월십일대상정변장령인정씨합장익년팔월시0우자십이월빗오일고성언진0고비0(00元年丁亥十二月十日大相丁㭓葬令人鄭氏合葬翌年八月始0于玆十二月十五日告成彦眞0考妣0)’등의 글자는 자형을 잘 쓰고 잘 새긴 것이나 줄의 배열이 균형 잡히고 적당한 것을 보면 분명히 고적이다. 그러나 다만 ‘변(㭓)’자는 깎아내고 고쳐 새로 새긴 흔적이 현저하다. 그 밖의 몇 글자도 의심스런 것이 있으나 ‘정(丁)’자는 변개(變改)한 흔적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정씨네 산의 명험이라는 것이다.
그 이른바 윤화(允樺)의 묘라는 것은 대석에 ‘융흥삼년을유이월칠일대상정공윤화정경부인정씨합장부경도승지정부인권씨중화원년무술십월일일합장우조부계하(隆興三年乙酉二月七日大相丁公允樺貞敬夫人鄭氏合葬父瓊都承旨貞夫人權氏重和元年戊戌十月一日葬于祖父階下)’라는 51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의 형태와 돌의 성질이 시중묘와 하나 같다.
그 이른바 정언진(丁彦眞)의 묘라는 것은 대석에 ‘가정팔년을해십월팔일대상정공언진지묘칠대조하 부묘재증조하쌍분형내사사인언중묘재백호(嘉定八年乙亥十月八日大相丁公彦眞之墓七代祖下 父墓在曾祖下雙墳兄內史舍人彦重墓在白虎)’라는 41자가 새겨져 있는데 석질이 매우 단단하여 졸지에 새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고적인 듯하나, 글자가 이미 얇게 깎이었고 돌 또한 떨어져 나가 있어 심히 불분명하였다.
이에 대장군묘를 먼저 열어보고 정변묘ㆍ정언진묘ㆍ시중묘를 차례로 열어 보았으나 모두 지석(誌石)을 찾지 못했다. 이에 흙을 더 높이 쌓고 떼를 갈아입히고 돌아왔다.
이상이 정지해(丁志諧)의 답사기(踏査記)인데 무덤의 당시 상태를 하나하나 정밀하게 검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석각(石刻)의 글자 숫자까지 밝히고 있어 치밀한 판독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여섯 무덤은 모두 조선(祖先)과는 관련이 부정되고 있다. 새삼 그 이유를 주목해보면, 모두 변조의 흔적이 역력하였기 때문이다. 정윤종(丁允宗)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묘비는 ‘깎고 갈아 고쳐 새긴 흔적’이 있고, 정량(丁良)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은 ‘근래에 새긴 흔적이’이 현저하며, 정열(丁悅)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은 ‘한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변(丁㭓)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은 ‘변(㭓)’자는 깎아내고 고쳐 새긴 흔적이 현저‘하기 때문에, 정윤화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은 정량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과 같은 혐의가 있어서, 정언진의 묘로 주장되는 묘의 명문은 ’글자가 이미 얇게 깎이었고 돌 또한 떨어져 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각 분묘를 소개하는 서두의 ’그 이른바 00묘라는 것은 (其曰 00云者)‘이나 ’이것이 이른바 정씨의 산이란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다(此所謂丁氏山之明驗也)‘라는 구절 또한 정지해의 심경을 잘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所謂)‘는 ’나의 견해‘가 아니라 ’남의 견해나 주장‘임을 뜻하는데 그 ’남‘은 낭혜(朗慧)이다.
이상 정지해의 검토를 이어, 뒤에 이를 바탕으로 현지를 답사한 정재원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와 조사 사실을 추가하고 당부를 남겼다.
대저 휘 윤종(允宗), 휘 혁재(奕材), 휘 량(良) 세 분은 비록 우리 시조 이하 3대의 보첩에 실린 분이나, 대장군의 묘표석 전후면은 모두 의심스런 단서들이다. 낭혜가 비를 뽑고 갉아내고 메고 갔다 메고 왔다는 전설이 사람들의 이목에 낭자하게 실려 있고 시중의 묘에는 돌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각자할 수 있으니 또한 진실이 아닌 것이 많다. 진주에 조상의 선영이 있다는 설은 이미 옛사람이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스러움을 전한 글이 없고 또 요사한 중이 위조한 흔적이 많으니 이미 감히 우리 선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나머지 네 분묘의 이름자가 또 집안의 문적에 전하지 아니한 것이겠는가?
정언진(丁彦眞)에 이르러서는 호남보에도 나타난 바가 없다, 시중묘는 ‘소정원년장’이라 하였고, 정언진 묘는 ‘가정팔년장(嘉定八年葬)’이라 하였으니 송(宋) 영종(寧宗)의 가정 을해(乙亥)와 이종(理宗)의 소정(紹定) 기축(己丑)은 그 사이가 15년에 지나지 아니하니 정언진은 또 어느 파에서 나누어졌는가?
내가 가만히 의심하건대 낭혜(朗慧)가 호남보(湖南譜)에 정열ㆍ정변ㆍ정윤화가 있음을 보고 진주의 주인 없는 산의 이름과 서로 부합되니 드디어 정씨의 산인 줄 알고 우리 대장군 선조 및 휘 량(良)의 양대의 분산도 또한 이 묘역 안에 있다 하여 표석과 대석을 거듭 갈아 각자를 고치고 그 본형을 변화시키고 고적(古迹)을 어지럽게 하여 우리 종중(宗中)에 대가를 요구할 기화로 삼았을 것이다. 비록 낭혜(朗慧)가 손을 대기 이전에 참으로 주인이 누구인지를 입증할 만한 것이 있었다 하여도 억지로 좇아서 알겠는가? 대개 이 산은 후손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이미 정씨의 묘역으로 일대 판국을 이루었으나 그 산 아래에 살던 수안 원을 지낸 이득주 가가 여러 대로 투장을 하여 지맥을 압박하고 계절을 파괴시켜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으니 대석을 파내고 각자를 깎아 고적을 인멸할 것은 필연의 형세이며 또 낭혜(朗慧) 때문에 영원히 단서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기겠는가! 근자에 듣건대 호남에 사는 정씨들은 참다운 사적을 보았다 하여 와서 제사를 받든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사실을 구명하지 않고 다만 성명이 혹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보와 같으므로 선조의 분묘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변하여 산만 있고 돌은 없어지면 호남의 설이 크게 유행하여도 그렇지 않음을 증빙할 것이 없을 것이니 우리 대장군 선조의 자손이 이곳이 참으로 우리 조상의 묘소가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 두려워서 삼가 선친께서 기록한 바를 뽑아서 후일의 증거로 갖추어 놓는다.
그 후 낭혜(朗慧)란 자는 머리를 기르고 환속을 하여 스스로 이름을 민신(旻愼)이라고 하였다가 또 남신(南愼)이라 고쳤는데 대개 우리 집 신(愼)자 항렬을 따른 것이다. 우리 칠대 방조(傍祖) 감사 윤우(允祐) 공의 아들 호근파(好謹派)의 무후(無後)한 밑에 투탁(投託)을 하여 보책(譜冊) 한 권을 만들어 시골의 정씨들에게 전파하다가 끝내 탄로되어 제종(諸宗)의 사법(司法)에 제소(提訴), 간사함이 판명되어 처벌되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진주의 일에서 그 정상(情狀)이 지극히 교활함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겠다.
요지를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진주에 조상의 선영이 있다는 설은 조상이 남긴 어느 문헌에도 없었다.
②진주 현지 주민들로부터 낭혜(朗慧)가 ‘비를 뽑고 갉아내고 메고 갔다 메고 왔다’는 무성한 변조 소문을 수집하였다.
또, 행적을 조사한 결과 낭혜(朗慧)는 환속하여 칠대 방조 감사 정윤우 공의 아들 호근파에 위조 보책을 만들어 투탁을 하였다가 탄로되어 처벌되었다. 이 일에서도 석갑산의 육총 변조의 정상이 얼마나 교활했던지 알 수 있다.
③이 묘역은 오래 버려져 있었는데다 이씨가(李氏家)가 투점(偸占)을 하면서 훼손을 기대하는 상황이기도 하여 임의의 변조가 가능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④우리 압해정씨의 선조들(丁允宗ㆍ丁奕材ㆍ丁良)을 연루시켜 비문 변조를 감행한 것은 우리 종중을 현혹하고 대가를 요구할 기화로 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⑤이른바 정윤종(丁允宗) 묘표석(墓標石)의 비문 ‘전후면은 모두 의심스런 단서들이다.’ 이른바 정량의 묘(墓)의 묘석은 ‘돌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각자(刻字)할 수 있으니 또한 진실이 아닌 것이 많다.’ 이 두 묘의 비는 ‘표석과 대석을 거듭 갈아 각자를 고치고 그 본형을 변화시키고 고적을 어지럽게’ 한 것이다.
⑥육총 중에서 4묘의 피장자라는 정열ㆍ정변ㆍ정윤화ㆍ정언진은 우리 족보에 이름이 없다. 또 그 중 우리 족보뿐만 아니라 호남보(湖南譜)에도 없는 정언진(丁彦眞)의 등장이 의아롭다. 파를 달리 한다고 하더라도 몰년이 정량의 몰년으로 주장되는 해와 15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그도 가능하지가 않다.
⑦낭혜(朗慧)는 호남보에 나열된 정열ㆍ정변ㆍ정윤화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이 묘역의 석각에서 보고 조작의 염두를 가졌을 것이고, 비록 동본(同本)인 압해정씨는 아니나 다른 정씨로 보인다.
⑧나머지 묘는 낭혜(朗慧)가 묘비를 멋대로 조작하여 피장자를 이제 밝혀내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주목을 끄는 사실은 ②로, 낭혜(朗慧)가 석갑산 육총의 비문을 변조하였다는 진주 현지의 소문과 압해정씨 일문 정윤우계 호근파에 위조 보책을 만들어 투탁(投託)하였다가 처벌된 사실을 수집한 성과이다. 낭혜(朗慧)는 나름대로 이 방면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이는 정재원이 1792년에 공관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이전의 두 해 동안 석갑산 육총의 소재지이자 낭혜(朗慧)의 활동 무대였던 진주의 목사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⑦은 아버지 정지해와 다른 견해지만 최종 견해가 아니다. 1791년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정지해의 견해와 같은 견해를 가지게 된다.
정재원(丁載遠)은 당대에 벌어지는 혼란과 파행을 문제시하고, 후일에 이어질 파란과 후유증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①호남의 정씨들이 선조의 분묘라고 믿고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이 육총의 변조 사실들을 제대로 구명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문제 있는 사보에 오른 이름들과 같다고 하여 일어난 소치에 불과하다.
②세월이 흘러 변조한 흔적이 역력한 이 석갑산 묘역의 비석들이 없어진 상태에서 무덤만 남게 되고 호남의 정덕성설 및 정덕성을 시조로 한 범정씨동근동조설과 상계 15대설이 크게 유행할 경우, 우리 압해 정씨 정윤종(丁允宗)의 정씨들도 마침내 현혹되어 이곳의 이른바 ‘대장군묘(大將軍墓)’라고 주장되는 묘소를 시조 정윤종의 묘로 모시고 떠받들까 심각하게 우려된다. 그때를 위한 증거로 이 기록들을 남기니 압해 정씨 후손들은 잘 활용하기 바란다.
정지해와 정재원의 <진주석갑산정씨분산변(晉州石岬山丁氏墳山辨)>은 성의가 비상하고 주도가 면밀한 글이다. 특히 후세의 혼란을 예견하고 끈질긴 후속 검토와 조사 등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한 사행(事行)은 깊은 인상을 준다.
다산은 1791년(정조 15년) 30세 때 처음 석갑산을 답사하였다. 다산은 이미 조부 정지해(丁志諧)와 부 정재원(丁載遠)의 판단이 여러 방면에서 정확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묘역을 답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다산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다산의 관찰은 한가지로 집약된다. <석갑산정씨육총변>에서 다산의 진술을 들어보자.
선군은 이미 여섯 무덤을 살펴보신 터였으므로 나에게 물으시기를,
“어떻게 보느냐? 모두 낭혜가 한 짓이고 오직 정변의 무덤에 새겨진 정자만이 과연 고적이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하시기에 나는 말하기를,
“저 이름을 전면에 새기지 않고 좌면에 새긴 것은 무슨 뜻이며 정변묘라 하지 않고 반드시 정변장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리고 변자를 깎아버리고 다시 새긴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다 알지 못할 일입니다.”
하니 선군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생각을 해보아라.”
하시었다. 내가 말하기를,
“이 까닭을 알 만합니다. 무릇 묘에 대해서는 ‘모공모명지묘(某公某名之墓)’라 쓰는 것이요, 장사 날짜에 대해서는 ‘모년모갑(某年某甲)’에 장사지냈다고 쓰는 것이니, 그렇다면 저 비의 정자 아래에 반드시 축(丑)ㆍ묘(卯)ㆍ유(酉)ㆍ해(亥) 등의 글자일 것인데 낭혜가 긁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고인의 이름이라면 어찌 고쳐 썼겠습니까?”
하니, 선군께서 부채로 손바닥을 치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것을 알았구나! 나의 생각도 바로 이렇다.”
하시고 드디어 상 위에서 단언하셨다.
“석갑산의 여섯 무덤은 정씨를 묻은 것이 아니다.”
‘정변(丁㭓)의 무덤에 새겨진 정(丁)자만이 과연 고적(古跡)’이라는 정재원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다산은 ‘변자를 깎아버리고 다시 새긴 것’에 착안하여 이른바 정변묘 동벽의 명문인 “대관원년십이월대상정변장”은, ‘대관원년십이월대상정축(혹은 묘유해 등)장’을 고친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즉 정지해(丁志諧) 이래 정지영(丁志永)을 거쳐 정재원(丁載遠)에 이르기까지,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분산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의 근거도 부정되었다. 문맥 가운데 ‘대상’이란 두 글자가 지재되어 있어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석갑산 육총의 압해 정씨의 조상과의 관련은 물론 정씨와의 관련도 단호히 부인한 사실이 주목된다. 정재원도 동의하였다. 정재원과 다산은 이 묘역이 자기 조상들의 묘역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씨의 묘역도 아니라는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는 석갑산 육총이 그만큼 변조 훼손이 심해 불신을 사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1791년 음력 3, 4월경 진주 석갑산 육총 묘역 현장에서 두 부자는 정지해를 이은 모색 끝에 드디어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 단안을 내렸는데, 1729년에 문제가 제기된 지 무려 62년 만이었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김언종:134-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