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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학자들의 견해 |
1) 명문(銘文)의 내용
진주석갑산 묘역의 특징은 모든 묘역에 명문이 있다는 것이다. 전면에만 있는 것도 있으나, 특수한 경우는 네 벽에 모두 명문을 기록한 경우도 있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호분(丁悅)
면석의 중앙에는 피장자를 알려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원풍이년십월일일대상정열지묘(元豊二年十月一日大相丁悅之墓)’이다. 명문은 좌측에서부터 시작하는 해서체로 매우 얕게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글자의 크기와 자간도 일정하지 않고, 서체 또한 조잡한 듯이 보인다. 또한 ‘원풍(元豊)’에서 ‘일(一)’자까지는 일렬로 나가다가 다음의 ‘일(日)’은 ‘일(一)’ 아래에 각하였으며, 다시 ‘대상(大相)’에서 ‘묘(墓)’까지는 일렬로 새겼다. 비교적 글씨 전체를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다.
(2) 제2호분(丁允樺)
동쪽의 면석 1/3 지점 상단에서부터 상단에 명문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융흥삼년을유이월칠일대상정공윤화정경부인정씨합묘부경도승지정부인권씨중화원년무술십월일일우조부00(隆興三年乙酉二月七日大相丁公允樺貞敬夫人鄭氏合墓父瓊都承旨貞夫人權氏重和元年戊戌十月一日于祖父00)’이다. 서체는 매우 작고 조잡하며, 또한 얕게 각을 하여 판독이 매우 어려운 편이다. 우측의 면석에서 1행으로 시작하는 명문은 중앙의 면석 2/3 지점에 이르면 5행으로 변하다가 4열을 지나면 3행이 된다. 즉 ‘융흥삼년을유(隆興三年乙酉)’까지는 일행으로 동편 면석에 새겨졌고, ‘二月七日’은 동편 우석의 상단에, ‘대상정공윤화정경부인정씨합묘(大相丁公允樺貞敬夫人鄭氏合墓)’는 정면의 면석 우측에서 시작하고 있다. 또 ‘부경도승지/정부인권씨/중화원년무/술십월일일(父瓊都承旨/貞夫人權氏/重和元年戊/戌十月一日)’은 縱으로 5행이 되고 있으며, ‘우조부(于祖父)’는 우측의 3행에서부터 시작하여 5행에 선을 맞추었으며, ‘00’은 자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3) 제3호분(丁允宗)
봉분 앞에는 다른 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묘표가 1기 세워져 있는데, 기단부는 호석의 지대석과 연결되는 판석에 홈을 파고 묘표를 꽂았으며, 묘표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 방향으로 반파되어 있어서 비의 형식을 알기는 어렵다. 현재 비양에 남아 있는 글씨는 ‘공윤종지묘(公允宗之墓)’이다. 서체는 해서체로 제1, 2호분의 글씨보다는 정연하게 새겨져 있으나, 종선의 자체가 고르지 않고,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또한 ‘宗’자의 각인이 다른 글에 비하여 너무나 선명하다. 비음에는 음기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은 불가능하다. (丁若鏞, <石岬山丁氏六塚辨>, 《與猶堂全書》 第1集, 詩文集, 辨에서 ‘碑陰記字畵攲斜 刻法若樵童之用鎌尖而亂畵之者 文則鬼怪不成理 所記皆古美爵’이라 하여, 당시에는 음기의 판독이 가능했던 것 같다. 한편 김무조 교수는 ‘비의 음기는 전문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후, 《압해정씨술선록》에는 그 비문이 나타나는데, 비문의 탁본과 대조해보면 일부를 읽을 수 있다‘(김무조, 위의 논문, 7쪽)고 하였다.)
(4)제4호분(丁彦眞)
정면 면석에는 우측에서부터 명문이 나타나는데, 명문은 해서체로서 현재 판독이 가능한 부분은 ‘가정팔/년을해/십월팔일/대상/정공/언진/지묘/칠대/조하/부묘/재0/조하/0분(嘉定八/年乙亥/十月八日/大相/丁公/彦眞/之墓/七代/祖下/父墓/在0/祖下/0墳)’이며 좌측에 명문이 더 있는 듯하나 판독이 불가능하였다.
(5) 제5호분(丁㭓)
정면의 지표면과 접한 면석 1단의 좌우 측면 하단에는 범자(梵字)로 보이는 명문이 삼각형을 이루며 새겨져 있다. 3단에는 해서체로 ‘령인정씨0묘(令人鄭氏0墓)’라는 글이 우측에서부터 규칙적인 간격을 유지하며 새겨져 있다.
동쪽 호석의 남쪽면 1단에는 범자(梵字)로 보이는 명문이 원안에 새겨져 있으며, 갑석 아래의 3단 250cm지점에서부터는 ‘정해십이월십일대상정변장(丁亥十二月十日大相丁㭓葬)’이라는 명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남쪽벽과 같은 서체로 판단되며, ‘상(相)ㆍ‘변(㭓)’ 자체(字體)는 박락(剝落)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는 불명(不明)하나 다른 서체에 비하여 작위적(作爲的)인 느낌을 준다.
서쪽 호석의 남쪽면 1단에는 범자로 보이는 명문이 원안에 새겨져 있으며, 갑석 아래의 3단 남쪽 끝에서부터 해서체의 명문이 있는데, ‘익년팔월시자십이월십오일고성(翌年八月始玆十二月十五日告成)’이라 새겨져 있다.
북쪽 호석의 중앙부에는 해서체의 명문이 보이는데, 좌측에서부터 ‘언진고조비(彦眞考祖妣)’라 새겨져 있다.
(6) 제6호분(丁良)
정면 면석 상부에는 해서체의 명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소정원년기축삼월칠일시중정공량지묘 0령0합묘재상(紹定元年己丑三月七日侍中丁公良之墓 0令0合墓在上)’이다. 서체는 자경 3cm정도의 작은 글씨로 얕게 새겨져 있고, 자체도 조잡하며, 자간도 일정하지 않고, ‘소정∼량지묘(紹定∼良之墓)’까지는 비교적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각인하였다. ‘0令0’은 3행으로 되어 있으며, ‘合’은 다시 1행으로 ‘묘재상(墓在上)’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2) 명문(銘文)의 검토
위 묘석의 명문에 대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석갑산정씨육총변(石岬山丁氏六塚辨)에서 대장군묘비(大將軍墓碑)는 ‘검교대장군정공윤종묘(檢校大將軍丁公允宗墓)’라고 되어 있는데, 자획이 거의 옳게 새겨져 있고 조금은 정교하지만, 비신(碑身)의 밑받침 돌에서 나온 부분이 비근(碑根)에 비교하여 두께가 두 푼(2分) 가량 감소되어 있으니, 이것은 갈아서 개각(改刻)한 것이 분명하고, 비의 음비(陰記)도 자획이 삐뚤어져 있고, 그 각법(刻法)은 마치 초동(樵童)들이 낫을 이용하여 첨예하고 어지럽게 긁어 놓은 것 같다. 또한 추잡하고 괴상하여 불합리하다(鬼怪不成理).
정변(丁㭓)의 묘석병(墓石屛)에는 왼쪽에 ‘대관원년십이월대상정㭓장(大觀元年十二月大相丁㭓葬)’이라고 씌어 있는데, 오직 십(十)ㆍ장(葬)ㆍ정(丁) 세 글자는 큰 글씨로 깊게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는 자획(字劃)과 각법(刻法)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울러 깎고 갈아서 개각한 것이고, 변(㭓)자는 도끼나 끌로 판 것이 더욱 심하다. 정언진 및 나머지 세 묘에 새긴 글은 더욱 거칠고 괴상망칙하다(荒怪罔狀).
라고 하여 위 명문을 ‘귀괴불성리(鬼怪不成理)’ㆍ‘황괴망상(荒怪罔狀)’이란 표현으로 혹평을 하면서 ‘석갑산 육총은 정씨의 장이 아니다(石岬山六塚非丁氏之葬)’란 말로 결론을 짓고 있다.
이들 명문들을 살펴보면서 당혹감을 금하지 못한 것은 이들 명문에서 나타나는 피장자(被葬者)의 관직(官職)에 대한 명칭이다. 명문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대상(大相)ㆍ도승지(都承旨)란 명칭이 보이고, 또 외명부(外命婦)의 직관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ㆍ정부인(貞夫人)ㆍ영인(令人) 등의 명칭이 보이는데,
(1) ‘대상(大相)’에 대하여
대상(大相)이란 명칭은 위 6기의 고분 중에서 4기에서 보인다. 즉 제1호분은 대상(大相) 정열(丁悅)의 묘라 하였고, 제2호분은 대상(大相) 정윤화(丁允樺)의 묘, 제4호분은 대상(大相) 정언진(丁彦眞)의 묘라 하였으며, 제5호분에서는 대상(大相) 정변(丁㭓)이란 명문이 보인다. 이들 피장자(被葬者)들은 모두가 당대(當代)에서 고위직을 누리고 있다. 제1호분의 정열은 중추사를 역임하였고, 의창부개국남이란 작호를 하사받고 있으며, 제2호분의 정윤화는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였고, 제4호분의 정언진은 평장사를 역임하고, 태자태부상주국안국공신의 칭호를 받고 있다. 또 제5호분의 정변도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있다. 이와 같이 훌륭한 관력을 가진 이들의 묘역에서 일체의 관직을 생략하고, 대상이란 명문만을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 ‘도승지(都承旨)’에 대하여
제2호분의 명문에서 대상정공윤화(大相丁公允樺)의 부(父)는 경(瓊)으로서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는 것이다. 경(瓊)의 행록(行錄)을 그들의 《족보》에서 찾아보면 고려 시대 종2품인 진현관태학사(進賢館太學士)를 거쳤고, 죽은 후에 종1품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증받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명문에서는 고려 후기에 5품직이었고, 조선 시대에 정3품이었던 도승지(都承旨)란 관직명을 묘석(墓石)에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나온다.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묘석에서는 당연히 최종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기록하거나 아니면 도승지보다 상급의 품계인 진현관태학사(進賢館太學士)의 관직명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위직인 도승지(都承旨)를 묘석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족보의 내용에서도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의문이다. 또 실제로 정윤화(丁允樺)가 생존하였다는 1124년(인종 2)∼1165년(의종 19)에는 고려 사회에서 도승지(都承旨)란 관직이 운영된 사례가 없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정경부인(貞敬夫人)ㆍ정부인(貞夫人)ㆍ영인(令人)
이들 묘역의 명문에 정경부인ㆍ정부인ㆍ령인 등의 직관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다. 이러한 내용은 제2호분 정윤화를 설명하면서 그 부인을 정경부인 정씨라 하고 있고, 그 부(父) 경은 도승지라 하면서 그 배를 정부인 권씨라 하고 있다. 또 제5호분에서는 령인정씨0묘라 기록하고, 측면에 대상정변장이란 명문을 남기고 있다. 이로 볼 때 대상 정변의 부인이 영인 정씨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부인에게는 남편의 관직을 기준하여 국대부인ㆍ군대부인ㆍ군군ㆍ현군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또 국대부인ㆍ군대부인ㆍ군부인 등의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고려 시대의 묘지명이라던가 묘비명에서 정경부인ㆍ정부인ㆍ령인이란 외명부 호칭을 본 일이 없었다. 이들 명칭은 조선시대에 사용한 외명부의 명칭이었다.
제2호분의 정윤화(丁允樺)는 종1품으로 그 부인은 정경부인이 되어야 하나, 그 부 경에 대하여는 직품을 도승지(都承旨)라고 하면서 부인을 정부인(貞夫人)이라 하고 있다. 설령 그가 고려 시대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도승지는 종5품으로 그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이 될 수 없고, 만약에 조선 시대의 품계를 적용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도승지는 정3품의 관계이므로 그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이 되어야 한다.
또 제5호분의 정변(丁㭓)은 압해나주정씨족보의 기록대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면 그 부인은 마땅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어야 하는데, 위의 명문에서는 영인(令人) 정씨(鄭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인은 4품의 문무관 부인에 대한 품계이다. 정변(丁㭓)을 문하시중을 역임한 대상으로 본다면 남편과 부인의 품계가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의문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고려 시대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든가 정부인(貞夫人) 또는 영인(令人)이란 외명부(外命婦)의 호칭이 없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비음기(碑陰記)에 대하여
이 밖에도 이 묘역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명문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제3호분 정윤종의 묘표에 기록되어 있다는 음기의 내용이다. 서두에 보이는 ‘대장정공윤종묘음기(大將丁公允宗墓陰記)’와 ‘유명고려국(有明高麗國)’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설혹 그가 대장의 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묘표(墓表)에는 최종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나 좌리동덕공신(佐理同德功臣)이란 작명(爵名), 또는 충렬공(忠烈公)이란 시호(諡號)를 써야 했을 것이다.
‘유명고려국(有明高麗國)’이란 내용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유명(有明)’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후부터이다. 특히 정윤종이 생존하였던 때는 명(明)이 건국되지도 않았던 시기이다. 따라서 ‘유명’이란 용어를 음기에 기록하였다면 이것은 ‘유명’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조선 시대에 당시의 관례에 따라 무심코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윤종(丁允宗)의 비음(碑陰)에 아직 건국하지도 않은 명(明)을 받들어 ‘유명(有明)’이라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는 맞지 않는 오류이다.
둘째, 명문의 자체(字體)와 내용에 나타나는 불합리성이다. 제3호분 정윤종의 묘표에는 ‘공윤종지묘(公允宗之墓)’라는 명문이 있는데, 서체는 해서체로서 제1ㆍ2호분의 글씨보다는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종선(縱線)의 자체가 고르지 않고,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으며, 특히 ‘종(宗)’자의 각인(刻印)이 다른 글자에 비하여 너무도 선명하다. 또 제5호분 정변(丁㭓)의 묘에서는 갑석 아래의 3단 25cm 지점부터는 ‘정해십이월대상정변장’이라는 명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남쪽 벽과 같은 서체로 판단되며, ‘상’과 ‘변’의 자체는 박락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지는 불명하나 다른 서체에 비하여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또 이 묘역에는 정해년(丁亥年) 12월 10일에 대상 정변(丁㭓)을 장사지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다산 선생도 지적하였듯이 ‘장(葬)’자를 사용할 때는 피장자를 장사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보다는, 흔히 0년 0월에 매장하였다는 동사로 사용하기 때문에 ‘장(葬)’자의 사용은 문맥상 무리가 있다고 보여 진다. 또 ‘상(相)’자와 ‘변(㭓)’자는 다른 글자와 달리 박락과 변색이 심하다. 또한 동벽에 새겨진 12자는 그 간격이 매우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는데, 보기 드물게 잘 쌓은 호석에 비하면 어색하다는 느낌을 준다. 즉 석장이 글자를 석재에 새기는 데는 먼저 확보된 공간에 몇 글자를 새길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자간을 맞추어 작업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동벽에 새겨진 명문은 자체의 수려함이나 정연함의 유무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자간의 일정함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훌륭하게 축조한 호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무덤의 북쪽에는 ‘언진고조비’라는 명문이 나오는데,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변(丁㭓)이 언진의 4대조임은 그들의 《족보》에서 확인되는바, 따라서 ‘考祖妣’는 ‘高祖妣’의 오자가 아닌가 한다. 또한 정언진의 4대조 무덤에 무슨 이유로 언진이란 성명을 기록하였는지도 의문이다. 이곳 안내판에 기재된 피장자의 생몰 연대를 따른다면, 정변 묘역이 조성되었을 시기를 정변이 사망한 해인 1107년(예종 2)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이때에 정언진(1133-1215)은 출생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변의 묘역에 태어나지도 않은 정언진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호석에 새겨진 명문의 연대와는 달리 그 후대에 축조되었거나, 아니면 호석에 기록된 명문은 묘역 조성 당시에 새긴 것이 아니라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셋째, 묘역의 피장자들을 포함한 이들 정씨의 세계가 거의 모두 재상을 역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훌륭한 가문이 충선왕 때 반포되고 있는 “재상지종”에서 누락되었는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즉 충선왕 복위 11월에 교서를 발표하여 종친으로서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때 선발되고 있는 것은 경주김씨ㆍ언양김씨ㆍ정안임씨ㆍ경원이씨ㆍ안산김씨ㆍ철원최씨ㆍ공암허씨ㆍ평강채씨ㆍ청주이씨ㆍ당성홍씨ㆍ황려민씨ㆍ횡천조씨ㆍ파평윤씨ㆍ평양조씨 등 15개 가문이다.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복위년 11월 신미.)
《압해나주정씨족보》에 기록된 가계가 사실이라면, 위에서 선발되고 있는 재상지종인 15개 가문보다도 더 훌륭한 가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 교서에서는 정씨가 누락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당시 정씨의 위상이 재상지종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또 위의 호석에 새겨진 명문에는 석갑산에 현재 발견된 6기의 고분보다 더 많은 나주정씨의 묘가 있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석갑산은 대대로 나주정씨의 세장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는 나주 정씨들이 세거하고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이들 묘소를 관리하는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주 지방에는 조선 시대 편찬된 어떠한 지리지에서도 이곳에 세거하고 있는 나주정씨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혹자는 묘를 실전하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초기의 성씨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것인데, 이들 기록에서 나주 정씨는 보이지 않고 있다. 즉 이곳 석갑산의 나주정씨의 묘는 진주지방과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조사의 기본 참고문헌이 되고 있는 각종의 지리지에서도 진주지방에서 나주정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나주정씨와 진주는 아무런 연고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편, 《나주정씨 선계연구(羅州丁氏 先系硏究)》, 서울 동문선, 2009. 01. 30. 재판발행. 신천식:174-217쪽))
3) 소결론
지금까지 사적 제164호 진주 평거동 고분군의 명문을 검토하였다. 본 고분군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주시의 문화유적 중 평거동의 고분들과 같은 형식을 가진 유적을 10여기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6기는 이미 경상남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비지정문화재인 나머지 4기의 고분도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진주시 인근의 고분들이 축조된 시기가 대체로 고려(高麗) 말(末)에서 조선(朝鮮) 초(初), 더 나아가서는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중기까지 진주 지방의 분묘 형태는 대체로 장방형에 호석을 두르거나 팔각형의 형태에 호석을 두른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장방형에 호석을 갖춘 형식은 경기 북부 지방에서도 고려말∼조선 초기의 분묘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조사된 바 있고, 또 조선총독부의 조사에서는 이러한 고분들을 조선시대 묘로 보고한 바가 있다. 특히 문화재대관의 진주 평거동 고려 고분군에 대한 다음의 설명은 이러한 점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장방형의 호석을 두른 분묘 축조 형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변화의 정도는 각 가문마다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묘역이 고려 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지금까지의 견해도 일단은 검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앞으로 고려 이후의 매장 양식이라든가 분묘 축조 형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정확한 변천과정을 고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평거동 고분군의 유적과 이들 유적을 비교 고찰하여 정확한 편년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한편 본 고분군이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에서부터 900년 전에 이루어진 유적이고, 고분의 호석에 사용된 석재가 연한 재질인 사암(砂岩)임을 감안한다면, 매장 당시에 기록한 명문이 현재까지도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는 점도 의혹이 간다. 화강암(花崗巖)과 같은 경질(硬質)의 석재(石材)로 300년 이상 경과한 경우는 마모가 매우 심해 판독이 어려운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간혹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가도 보존상태가 좋은 금석문이 발견되기도 하나 대체로는 조선조 이전의 금석문은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18세기 이전까지 실전되어 방치되었던 고려 중기 이전의 묘역에 새겨진 금석문이 이렇게 온전하게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고분군에 새겨진 명문은 고분의 축조 당시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새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제1호, 제2호, 제4호, 제6호 고분의 서체가 거의 동일하고 명문의 내용 또한 고려시대의 상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