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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
조선 사회는 17세기에 이전에 없던 상당한 변동이 초래되었다. 1592년 이래 임진왜란 7년 전쟁을 겪으며 인구와 경작이 감소되면서 유리를 위시 주거의 이합집산이 거듭되는 가운데 전쟁 수행을 위한 독려와 전공(戰功) 포상, 공명첩 남발 등으로 신분 변화가 수반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신복하던 여진의 굴기로 종주국 명나라의 멸망, 청나라의 건국과 조공 등 국제질서가 바뀌면서 국가와 기존 지배층의 권위는 더욱 손상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는 기존 신분 질서에 혼란이 개재되는 와중에 이전 시대에 비교해 자계에의 관심이 증폭된 시대였다. 하지만 체제의 근본 구조 해체와 신분 관념의 지양이 없는 상황에서 그 변화와 욕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분 상승에 직접 간접 관련된 명조(名祖) 조작, 사적(史蹟) 가공 및 각종 투탁(投託)이 시도되었고, 일부 양반 계층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과장과 분식을 시도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으며, 일부는 그러한 형태를 난진(亂眞)으로 경계하고 거부하면서 사실에 충실한 정체성을 강화하였다.
진주 석갑산(石岬山) 분묘에 대해서는 일찍이 지해(志諧)ㆍ재원(載遠)ㆍ약용(若鏞) 삼대(三代)공이 나서서 차례로 현지답사를 하고, 비석과 석물 등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 석질(石質), 문장 내용, 그리고 우리 선조의 분묘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전언(傳言)한 낭혜(朗慧)라는 요승의 위인(爲人)과 그 행실 등등을 다각적으로 연구 검토한 끝에 진주 석갑산 육총(六塚)은 우리 정씨의 장(葬)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바가 있다.
보학(譜學)의 권의자 이수건(李樹健) 교수는 나주정씨의 시조 정윤종에 대해서는 원래 본관 압해에 토착하고 있었으니 그 묘소가 본관 이외의 지역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했다. 따라서 정열행장(丁悅行狀), 대장정공윤종묘음기(大將丁公允宗墓陰記), 진주 석갑산 고총 병풍석에 새겨 놓은 문자, 그리고 화보재태부공구서(華補齋太傅公舊書) 등이 다 위조되었음을 확정하였고, 특히 정열행장에서 최사위(崔士威)를 외조(外祖)로, 강감찬(姜邯贊)을 처부(妻父)로 조작하고, 정열의 선계(先系)를 조작하여 이른바 당 대양군 정덕성과 연결시킨 것은 위작의 정도가 너무 심하여 거론조차 하기가 부끄럽다고 하였다.
고려대학교의 김언종(金彦鍾) 교수도 석물에 새겨진 내용과 각자(刻字)의 마모(磨耗)된 정도까지 언급, 일일이 지적하면서 그 날조된 사실을 논증하였다.
즉 낭혜가 다산가에 와서 석갑산 이야기를 한 것이 1729년이고, 다산선생이 <사보변(私譜辨)>을 쓰신 것이 1791년으로 62년의 기간인데 그 사이 석갑산의 ‘대장군정공윤종지묘(大將軍丁公允宗之墓)’에서 이미 앞 4자가 마멸되고, 정량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에는 ‘부령동정혁재(父令同正奕材)’ 6자가 마멸 되었다. 1079년에서 1228년까지 약 150년 간 조성되었다는 비석의 음문이나 사대석에 새긴 글자가 최소한 정지해가 명문을 베낀 1748년까지 520년간 161자 가운데서 겨우 5자가 마멸되었다면, 그 후 다산선생 시대까지 62년 사이에 벌써 10개 이상의 글자가 마멸되고, 그 후 현재까지 겨우 2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모든 석물의 각자가 거의 판독할 수 없을 만큼 마멸되었다는 것은 이는 낭혜가 활동하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석갑산 육총의 비문 등이 일시에 변조되었음을 강력하게 말해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에는 피장자의 간단한 이력을 기록한 묘지명을 돌에 새겨 무덤 앞에 묻는 풍습은 있었지만 묘전에 비를 세우지는 않았다 한다. 묘전비(墓前碑) 설립은 조선 시대의 풍습이니 그렇다면 직계 자손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누가 이곳에 조상도 아닌 정윤종을 위하여 비를 세웠단 말인가? 극히 예외로 비를 세웠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정윤종의 몰년이 1173년이라 하니 적어도 1180년을 전후하여 조성되었을 이 비문이 6백여 년이 지난 1791년에 다산이 갔을 때는 전문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1748년에 정지해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글자의 완결된 것이 없다.”며 의심한 바가 있다. 그런데 정지해가 본 이후로 253년, 다산이 본 이후로 2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2001년 현재는 거의 식별할 수 없이 마멸된 상태라는 것은 다시 말해 이 비문 역시 17세기 말 18세기 초 무렵에 경석이 아닌 돌에 변조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증빙한다.
일찍이 미진한 선대 가계를 가공하거나 분식하지 않고 있었던, 사실 자체에 충실하는 전통을 일군 가문의 여서(餘緖)를 승계하여 이 문제들을 변파(辨破)한 압해정씨의 연명한 노력은 그 의의가 압해정씨의 정체성 추구에만 그치지 않고 나아가 아직도 이 나라에서 유사한 숙제로 시달리는 여러 문중에게 정채로운 귀감이 된다. 위선과 타협을 거부하며 15세기 중반 이전에서부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준 실사구시의 자세는 가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 자세이자 세계관이기도 하기에 새삼 주목된다. 즉 처음 이 문제는 특히 압해도 고분을 둘러싼 애초 전설과 그 거듭된 발전 과정에서 보듯, 모두가 봉건사회의 모순적 사회 정치 구조에 기인한 것이므로 불순한 대로나마 일말의 동정이 있을 수 있었지만, 쟁점이 부각되고 거짓이 구명되었는데도 억지를 견지할 경우 정의(正義)와 순리(順理)에 도전하는 불의(不義)와 역리(逆理)로 귀결되고 만다는 사실도 이 두 설의 후유증과 더불어 남는 교훈이라고 할 것이다.